사학사(史學史)의 대가로 꼽히는 조지 이거스 버펄로 뉴욕주립대 명예교수가 1985년과 1997년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을 찾아 민족주의 패러다임의 극복을 강조했다. 신원건 기자
“나는 미국 시민권자인 동시에 독일 시민권자이고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과 함께 민권운동을 펼치며 흑인문화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냥 조지 이거스일 뿐입니다.”
지난달 29일 열린 한양대 비교문화연구소 주최 해외석학 국제 콜로키움 참석차 내한한 조지 이거스(79) 버펄로 뉴욕주립대 명예교수. 세계역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이번 콜로키움에서 ‘민족국가 패러다임을 넘어서’라는 주제로 특강을 펼쳤다. 이에 앞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생애를 반추하는 방식으로 민족주의 극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38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저는 스스로를 독일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치에 대한 환멸로 저는 제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건국의 사상적 기초가 된 시오니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건국된 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시오니즘에 대한 좌절에 빠졌습니다. 또 저는 백인이지만 1950년대 남부로 가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뛰어들면서 미국의 이중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민족주의는 질병”이라고까지 말했다. 약소국가로서 열강들 속에 살아남기 위해 민족주의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너무 과격한 발언이 아닐까. 민족이 근대적 산물임을 주장한 ‘상상의 공동체’의 저자로 올 4월 한국을 찾은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조차 “21세기에도 민족주의는 번성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한국을 보십시오. 빌딩들의 건축양식, 사람들의 외모, 대중음악으로 봤을 때 서울이야말로 가장 세계화된 도시입니다. 나는 솔직히 터키보다는 한국과 일본이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 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가 여전히 강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삶의 양식은 이미 세계보편주의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특강에서 근대 역사학을 확립한 랑케와 드로이젠의 민족주의 역사관이 독일의 근대화 과정의 산물이란 점을 제시하면서 “역사가의 사명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온갖 종류의 신화를 해체해야 한다는 점에서 민족주의도 예외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