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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 동트기 전

입력 | 2005-07-02 03:18:00

그림 박순철


“군사를 물려라! 남쪽으로 간다. 유방부터 잡아 죽여 이 형양성을 머리 없는 귀신으로 만들어 버리자.”

패왕이 그렇게 명을 내려 군사를 남쪽으로 몰고 갔다. 종리매에게 군사 2만을 남겨주며 형양성을 에워싸고 있게 하였으나 한군(漢軍)에게는 지옥 같던 공성(攻城)은 그날로 그쳤다. 그런데 남쪽으로 군사를 휘몰아 내려오던 패왕은 양성(陽城)에 못 미쳐 또다시 분통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회남으로 내려간 구강왕 경포가 그곳에서 군사 1만을 이끌고 올라와 한왕과 합세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완읍(宛邑)과 섭읍(葉邑) 사이를 휩쓸며 분탕질을 치고 있는데, 그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면 회북(淮北)의 땅은 영영 대왕의 다스림에서 벗어나고 말 것입니다.”

섭읍에서 쫓겨 온 이졸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패왕의 눈길에서 다시 불길이 일었다. 먹물로 떠서 시퍼런 경포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흉악하게 떠올랐다. 항백을 시켜 그 처자를 모조리 죽여 버린 일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얼굴 푸른 도적놈이 회북으로 올라왔다고? 회남을 지키러 간 대사마 주은(周殷)은 무얼 하고 있단 말이냐?”

패왕이 그렇게 소리치며 한층 사납게 군사를 몰아댔다.

그 무렵 한왕과 경포도 패왕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섭성에서 만나 머리를 맞대고 패왕을 맞이할 궁리를 짜냈다.

“항우의 성격으로 보아 이번에도 대군을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5만을 넘지 않을 것이니, 대왕과 신의 군사를 합치면 머릿수로는 항우와 맞서볼 만합니다. 게다가 초나라 군사는 급한 마음에 천리를 달려오는 군사들이라 우리가 길목에서 쉬며 기다리다가 받아치면 못 이길 것도 없습니다. 완성(宛城)으로 대군을 물리는 척하고 매복과 유격(遊擊)을 배합하여 적을 괴롭히다가, 틈이 생기는 대로 우리 양쪽 군사를 일시에 집중하여 적을 들이쳐 보면 어떻겠습니까?”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잃은 원한 때문인지 경포가 그렇게 정면으로 싸워보자고 우겼다. 한왕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항왕의 무서운 돌파력은 천하가 익히 알고 있소. 항왕이 강동(江東)을 나온 이래 정면으로 그의 대군과 맞서 견뎌낸 이는 아무도 없었소. 게다가 이미 우리 싸움은 한두 번의 전투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오. 크고 작은 기세가 얽히고, 곳곳의 전기(戰機)가 엇갈리면서 풍운을 일으키다가, 때가 되면 홀연 승패가 갈리면서 천명(天命)이 그 주인을 찾아 이를 것이외다. 따라서 우리는 각기 성벽을 높이고 굳게 지키며 그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하오. 섣불리 항왕의 날카로운 칼끝과 맞섰다가, 기약할 뒷날조차 없이 되어서는 아니 되오. 구강왕은 이 길로 완성에 들어 성벽을 높이고 해자(垓字)를 깊게 하시오. 과인은 섭성에 자리 잡고 역시 굳게 지키며 변화를 살펴보겠소.”

원생(轅生)이 한 말에 장량과 진평이 거들어 세밀하게 다듬어준 계책이었다. 한왕이 그렇게 말하자 경포가 성에 안찬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