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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정치꾼]“성지순례로 박멸”… 섬뜩한 당게浪人

입력 | 2005-07-02 03:18:00


《일부 누리꾼(네티즌)에 의한 언어폭력, 특정인에 대한 마녀사냥식 공격, 감정적 여론몰이 등이 사회 문제화한 지 오래다.

매카시즘에 빗댄 '네카시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국적을 포기한 사람에 대해서는 재외동포에게 주는 혜택을 박탈하도록 한 재외동포법 부결에 대한 누리꾼들의 '융단폭격' 같은 반응에서 보듯, 정치 분야는 특히 문제가 심각하다.

과연 그 실상이 어떤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을 정밀 분석해 봤다.》

▼게시글 절반 비방-욕설… 실명제 무색

“A는 마타하리, 이중간첩 의심 간다.”

“A ×새, 당신의 ○○○를 뜯어버려라. 네가 탈당하면 화장실서 웃을 사람 무지 많다.”

열린우리당에서 실용파로 분류되는 A 의원이 6월 10일 “개혁당이 나가 준다면 화장실에서 웃을 의원이 많을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직후 열린우리당 인터넷 홈페이지 ‘당원 게시판(당게)’에 올라온 글의 일부다.

이날 A 의원은 무참하게 ‘박멸’됐다. 누리꾼(네티즌)들은 이처럼 특정 정치인을 타깃으로 삼아 인격모독성 공격을 퍼붓는 것을 ‘성지순례’라며 자족해 한다.

열린우리당 당게는 등록된 당원만 실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지만 특정인에 대한 욕설 수준의 비방이 판을 치기는 일반 인터넷 사이트와 다르지 않다.

병역기피 목적으로 국적을 포기한 사람에 대해 재외동포에게 주는 국내 건강보험 혜택 등을 박탈하도록 하는 내용의 재외동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직후에는 법안에 반대한 의원들에게 ‘무차별 폭격’이 쏟아졌다. “더러운 ××들. 개혁 좋아하네”, “그래 너희 아들 손자 모조리 군대 가지마라”….

더 큰 문제는 당게가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점.

본보가 5월 11일∼6월 10일 한 달 동안 열린우리당 당게에 오른 총 2973건의 글을 분석한 결과 이 기간 한 차례 이상 글을 올린 이는 754명이며 그 중에 66명이 전체 글 건수의 절반 이상을 올린 것으로 집계됐다.

상위 15명이 689건(23.2%)의 글을 올렸다. 혼자서 무려 98건의 글을 올린 당원도 있었다. 이처럼 열성적이며 외곬으로 글을 올리는 이들을 ‘당게 낭인(浪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열린우리당 당원이 일반당원과 기간당원을 합쳐 70여만 명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수에 의해 당 여론이 심각하게 굴절되고 있는 셈이다.

6월 10일의 경우 하루 동안 게시된 전체 글 290건 중 당내 특정 정치인이나 정파를 비난한 글은 33.8%, 누리꾼들 간의 상호 비방이나 욕설은 15.2%였다. 반면 건전한 정책 제안은 고작 8건, 정치 지형에 대한 분석 글은 34건으로 전체의 14.4%에 그쳤다.

이처럼 당게가 건전한 토론이나 정견 개진의 장이 아니라 소수의 상호 비방 무대로 전락하면서 “지긋지긋한 저질 싸움놀이 중단하고 당게 논쟁을 살리자”며 자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한 당원은 “인격 모독과 인격살인까지 주저하지 않는 글들, 특정인에 대한 욕으로 가득 찬 글들, 세 줄짜리 천박한 비아냥거림이 ‘베스트 뷰’에 가득하다”고 한탄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對與대응 미지근하면 “경로당이냐”▼

“정말 경로당보다 못한 한나라당이다. 열린우리당 법안이 모조리 통과되는 걸 보니 열우당(열린우리당) 본부중대인가 보다.”

“국방장관 해임안 부결로 ‘독재 정권’의 의미는 증폭돼 한나라당이 다음 선거에서 국민의 몰표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 주도의 윤광웅(尹光雄) 국방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부결되자 1일 당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당지도부의 대여(對與) 전략을 놓고 이런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한나라당 게시판은 열린우리당 당게와는 다소 내용이 다르다.

당내 특정인에 대한 비방이나 계파 간 노선 투쟁보다는 주요 현안이나 핫이슈에 초점을 맞춰 당 지도부의 대응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식의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잦다.

이는 4·30 재·보선 승리 이후 박근혜(朴槿惠) 대표의 당 장악력이 높아지면서 친박(親朴)-반박(反朴) 구도가 느슨해지는 등 당내 세력경쟁이 약화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열린우리당 당게가 당원으로 참여 자격을 한정하다보니 참여자들의 관심이 ‘내부’로 쏠리는 경향이 있는 데 비해 한나라당은 당원 게시판을 별도로 두지 않고 누구든 회원으로 가입하면 글을 쓸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관심 영역도 다르다.

6월 10일 하루 동안 게재된 총 493건의 글을 분석한 결과 당시 ‘고졸 대통령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던 전여옥(田麗玉) 대변인에 대한 옹호나 비난 의견이 전체의 49%인 243건에 이르렀다. 일반 정치 사안에 대한 글은 78건(16%)이었고 박 대표를 둘러싼 논란은 18건(4%)이었다. 이 밖에 여권을 비난한 글이 73건(15%), 당내 일반 현안에 대한 의견 제시가 21건(4%)이었다. 단순한 욕설 등 의미 없는 글은 55건(11%)이었다.

열린우리당에 비해 ‘당내 투쟁’은 적지만, 윤 국방부 장관 해임건의안 국회 본회의 처리 표결에 불참한 K 의원에 대해 “당이 마음에 안 들면 떠나라. 열린뚜껑당에나 가라”고 비난하는 등 당 소속 의원에 대한 인신공격도 꽤 올라온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을 비난하는 대여(對與) 공격성 글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 게시판도 소수가 좌지우지하기는 열린우리당과 마찬가지.

6월 1일부터 10일까지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모두 3400건이고 글을 올린 사람은 1271명이었다. 이 중 6건 이상 글을 올린 104명이 전체 글의 48%를 쏟아냈다. 30건 이상 올린 사람은 16명이지만 건수로는 전체 글의 20.5%를 차지했다. 20건 이상 올린 상위 23명이 올린 글 건수는 전체의 25.4%였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극단적으로 써야 댓글 많이 올라와”▼

특정 정당의 인터넷 게시판에 한 달에 많게는 100건에 가까운 글을 올려 당원게시판을 좌지우지하는 ‘인터넷 정치 전사’들은 누구이며, 왜 그처럼 열성적인가.

우선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글을 올리는 유형이 있다. 이들은 특정 정치인이나 정파, 또는 정당의 입장을 대변해 상대 정파와 노선 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자기가 올린 글에 대한 다른 누리꾼(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며 쾌감을 얻는다는 게시판 마니아도 있다. 열린우리당 지지 성향의 한 누리꾼(34·고시준비생)은 “극단적으로 글을 써야 댓글이 많이 올라온다. 그 때문에 일부러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다. 중립적인 글을 쓰면 반응이 별로다”고 말했다.

자신을 ‘인터넷 폐인’이라고 표현한 김모(27·회사원) 씨도 “노무현 지지자라고 쓰는 것보다 ‘노빠’라고 써야 그럴듯해 보이고, ‘지구를 떠나라’는 식으로 공격해야 시선을 끈다”며 자극적인 표현을 쓰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처럼 유형도 다양하고 동기도 제각각이지만 몇 가지 흐름은 있다.

열린우리당 당게를 자주 찾는 A(28·회사원) 씨는 1일 “게시판 세계에서도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시판에서 우위를 점하고 세력을 형성하려는 일종의 권력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인터넷 전사’들은 당 홈페이지뿐 아니라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순회하며 글을 게재한다. 글을 하나 쓴 뒤 “본전을 뽑겠다”며 자신의 아이디로 글을 올릴 수 있는 사이트에 모두 올리는 이들도 있다고 한 누리꾼은 귀띔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당 게시판이 소수의 당게 낭인에 의해 점령되고 비방전의 무대가 되면서 2002년 대선 때 필명을 날렸던 ‘진짜 논객’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터넷 정치’의 영향력도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처음에는 당게의 눈치를 봐 왔으나 이제는 그런가보다 한다. 당게에 거의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동아일보 대학생 명예기자인 이지연(서울대) 송혜영(이화여대) 씨와 동아일보 3기 인턴기자인 신희석(연세대) 신성미(서울대) 씨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