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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頂上대화 조율사’ 대통령의 통역들

입력 | 2005-07-02 03:18:00


“박진이, 니 통역 잘하그래이∼.”

1993년 7월 한국을 방문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조깅을 마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청와대 녹지원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선물로 줄 친필 휘호를 써내려간 뒤 이렇게 말했다. 휘호를 본 박진(朴振·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당시 해외공보비서관은 당황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정도를 걸으면 거리낄 것이 없다’는 이 말을 박 비서관은 먼저 “Righteousness overcomes all obstacles(정의로움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다)”라고 의역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A high street has no main gate(큰 길에는 문이 없다)”라고 직역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더욱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다시 “A freeway has no tollgate(고속도로에는 요금정산소가 없다)”라고 미국식으로 설명했다. 그때서야 클린턴 대통령이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장대소했다.

미국 국무부에서 30년 가까이 역대 미국 대통령, 또 북-미 접촉 시 한국어 통역을 담당했던 김동현(미국명 통 킴·69) 씨가 최근 은퇴하면서 대통령의 통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의 통역은 ‘피 말리는’ 직업이다.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말 하나, 토씨 하나 잘못 전달했다간 국가 대사(大事)가 틀어질 수 있다. 때로는 대통령의 잘못까지 잡아주는 ‘대화 조율사’의 역까지 맡아야 한다.

지난해 7월 제주도에서 열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명)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일본 기자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다케시마 문제는…”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한국 측 통역이 이를 “독도 몬다이와(독도 문제는)…”로 바로잡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브라질을 방문한 노 대통령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실바 대통령과 만찬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브라질 농산부 장관이 “한국이 개방을 안 하니까 농산물값이 (브라질보다) 10배가량 비싸다”고 수입개방을 요구했고 노 대통령은 “다 제 값을 하는 거겠죠”라고 애매하게 받아넘겼다. 이를 통역이 “외국 농산물은 질이 떨어진다”는 취지로 전달하는 바람에 룰라 대통령이 무슨 소린가 하고 바짝 긴장하는 표정을 지은 적도 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한때 “일정 취소하고 떠나자”▼

1982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아프리카 가봉을 방문했을 때 발생했던 ‘국가(國歌) 사건’은 지금도 외교통상부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전 대통령을 맞는 공항 영접행사에서 가봉 측 군악대가 애국가가 아닌 북한 국가를 연주한 것. 수행원들은 경악했고 전 대통령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당장 방문을 취소하고 떠나자”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결국 이날 만찬에서 가봉 대통령의 사과를 보고 결정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날 만찬장에서 전 대통령과 수행원들은 가봉 대통령의 사과만 기다렸다. 만찬이 시작된 후 가봉의 봉고 대통령은 “매우 심심한 사과를 드리며…”라는 외교적 수사(修辭)의 사과만을 했다. 순간 프랑스어 통역을 맡았던 외무부 직원 박재선(朴宰善·현 외교부 모로코 대사) 씨가 이를 “백배 사죄 드리며…”로 통역했다. 비로소 전 대통령의 안색이 풀렸고 수행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프랑스어에 ‘백배 사죄’라는 표현이 있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