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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임규진]방글라데시 소년 시플루

입력 | 2005-07-04 03:13:00


지난해 12월 26일 밤 방글라데시 다카 공항. 16세의 시플루 군은 한국의 공장에서 손가락을 잃었지만 입국장에 들어서면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마중 나온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소년의 귀국길에 동행했던 성공회 이영 보좌사제가 지켜본 부자(父子) 상봉 광경이다.

시플루 군이 1000만 원의 빚을 지고 학생비자로 한국에 온 것은 2003년 8월이었다. 맏아들인 그는 전부터 동생 5명과 부모 등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의 한 가구공장에 취업한 소년은 두 달 만에 전기톱에 왼손 세 손가락이 잘렸다. 그 바람에 일자리를 잃게 됐지만 귀국도 못하고 1년여를 불안 속에서 보냈다. 그는 “아빠 엄마가 일할 형편이 안 돼요. 내가 돈을 벌어야 해요”라며 고향의 가족 걱정만 했다고 한다.

이영 보좌사제는 반년 전의 방글라데시 방문 소감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시플루의 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다. 어떻게 15세밖에 안된 아들을 외국에 일하러 보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의 현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너무나 가난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탓할 수 없었다.”

못사는 나라의 부모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은 닮았다.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이 지금의 방글라데시와 비슷했던 1960년대, 시플루군의 아버지처럼 자식을 외국의 험한 일터로 내보내야 했던 부모가 이 땅에도 많았다. ‘가난의 자식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절대빈곤의 참상(慘狀)을 외면한 채 배부른 불평등보다 배고픈 평등이 낫다는 사람도 있다. 일부 영국인은 1인당 연간소득 300달러대의 방글라데시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치켜세웠다.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은 이런 주장을 근거로 “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하다”고 내세웠다.

방글라데시는 ‘성장 없는 분배’의 비극을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영국도 노동당의 분배우선 정책으로 재정이 파탄나면서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1979년 집권한 대처 총리는 분배지출 감축, 정부개입 축소와 기업활동 보장 등 성장우선정책을 1990년까지 일관되게 추진해 영국경제를 살려냈다. 반면에 분배에 다걸기(올인)한 북유럽 복지모델은 해체의 길을 걷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변하고 있다. 성장에 온힘을 쏟는 중이다. 비효율적이고 부패가 심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적극 추진하고, 민간투자를 국내총생산(GDP)의 17.5%에서 20%까지 끌어 올릴 계획이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지난 몇 년간 5%대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올해와 내년은 6, 7%를 기대하고 있다. 이 나라의 성장 총력전이 10년 이상 계속된다면 시플루 군이 스키를 타러 한국에 다시 올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경제도 생물이다. 19세기 세계 4위를 자랑하던 경제대국이 이른바 ‘남미(南美)형’이라는 만성적 경제위기와 빈부격차에 시달리기도 하고,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일본을 빼고는 아시아에서 가장 잘살던 나라가 세계 최대의 ‘가정부 수출국’이 되기도 한다. 한국은 땀 흘리며 오르막길을 가고 있는가, 속절없이 내리막길을 미끄러지고 있는가.

임규진 논설위원 mhjn2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