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홍보실장인 미혼의 김지은(金知恩·35) 씨는 ‘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일종의 산업재해”라는 농담으로 맞받는다.
“늘 일이 먼저였다. 결혼을 일부러 안 한 것도, 능력이 없어 못한 것도 아니고 결혼에 대한 ‘절박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진 가장 큰 원인은 결혼을 늦추거나 하지 않는 미혼, 만혼이 늘어나서다.
2003년 기혼 여성의 합계출산율(15∼49세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녀의 수)은 1.8명이었다.
전체 합계출산율이 1.19명으로 떨어진 까닭은 가임기 여성 중 미혼, 만혼이 급증했기 때문. 25∼29세 여성의 미혼율은 1970년 9.7%에서 지난해 33%로 늘었다.
또 초혼 연령의 상승과 합계출산율 하락 주기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렇다고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만 탓할 것인가. 일과 양육을 갈등 없이 병행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한국에서 여성들에게 결혼은 어쩌면 ‘미친 짓’일는지도 모른다.》
사회활동과 가족생활을 갈등 없이 병행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에게 결혼은 일종의 모험일지도 모른다. 싱글 여성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 ‘싱글즈’의 한 장면.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서른을 갓 넘길 땐 세상에 서른은 나 혼자 남은 줄 알았다. 서른여섯… 아직도 내 주위를 배회하는 많은 싱글.’
현재 시청률 1위인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드라마의 주 시청자인 30대 미혼여성의 댓글이 유독 많다. 회사원 이은주(李恩珠·33) 씨는 이 드라마에 공감하는 이유에 대해 “독신주의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대다수 싱글 여성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혼여성들에게 결혼이 ‘선택’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박수미(朴秀美)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위원은 “양성평등 의식과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의식 사이의 지체 현상이 커져 젊은이에게 결혼을 통한 가족 구성이 더 이상 필수도, 매력적인 유인도 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사회진출 속도가 양성평등 실현의 속도를 추월해버린 사회일수록 결혼을 최대한 늦추는 만혼 현상이 심해진다. 남유럽의 대표적 저출산 국가인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마드리드에서 국제적십자사 주선으로 30∼50대 여성 5명과 그룹 인터뷰를 한 결과 결혼연령과 첫 아이 출산연령이 젊은 세대로 올수록 늦어졌다. 5명 중 40대 중반 이후인 여성 3명의 공통점은 20대에 결혼했고 자녀가 둘 이상이며 직장에 다니는 동안 입주 도우미, 혹은 친정부모가 자녀를 돌봐줬다는 것.
반면 아나 아르타사 히메네스(36) 씨와 엘레나 몬테스(43) 씨는 둘 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직장을 갖느라 결혼이 늦었다. 또 친정 부모가 아직 현업에 있어 도움을 받기 어렵고 아이를 보육원에 보내며 일과 가사를 병행하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늦게 결혼해 인공수정으로 쌍둥이를 낳은 몬테스 씨는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갖고 있지만 아이 때문에 직장을 세 번 옮겼고 결국 지금은 시간제 자원봉사를 한다. 그는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다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서유럽을 보니…▼
유럽연합(EU)은 출산연령 상승이 중단되면 합계출산율이 당장 1.5명에서 1.8명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할까. 미혼 현상이 심각한 일본은 1월 정부가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결혼정보업체에 대한 정부 보조, 3100개의 결혼정보업체 중 일정 수준 이상의 업체에 인증마크를 주는 제도의 도입 등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영태(曺永台) 교수는 “한번 늦춰진 초혼, 출산 연령이 앞당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출산율이 회복된 것은 결혼연령이 앞당겨져서가 아니라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혼외출산과 35세 이상의 노산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2003 전국 출산력 조사’를 진행한 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金勝權) 연구위원도 “결혼연령의 상승, 높은 미혼율이 출산율 저하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약 20년간 유지되고 있는 현재의 저출산 기조는 바꾸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혼, 만혼과 그로 인한 저출산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므로 안전한 노산을 보장하는 의료제도, 미숙아 보험 등 인구의 질 향상에 주력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換亂뒤 고학력男 결혼 빨라졌지만 고학력女는 늦어져▼
“주변에서 왜 혼자냐고 물을 때마다 속이 터진다. 정말 이상한 건 또래 미혼여성은 ‘차고 넘치는데’ 교제 가능한 미혼 남자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거다.”
익명을 요구한 영화기획자 이모(36·여) 씨는 “만날 남자가 없어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대신 ‘이 사람은 정말 놓치고 싶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면 이제 와서 결혼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딜레마라고 했다.
미혼의 기회비용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결혼을 늦춘, 나이 많은 고학력 여성들은 배우자를 찾기 어려워져 결혼을 비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특히 노동시장의 성격을 바꿔버린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이 같은 현상이 심해졌다. 합계출산율이 1.5명 이하로 뚝 떨어져버린 것도 이때다.
동아대 사회학과 박경숙 교수팀이 1998∼2002년 노동패널 조사 자료를 분석해 5월 말 발표한 ‘남녀의 결혼시기 결정 요인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고학력 남성일수록 결혼을 빨리, 고학력 여성일수록 결혼을 늦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위기 이후 학력의 계층화가 심해진 상황에서 교육이 남성에겐 결혼의 자원이 되는 반면 여성은 고학력이어도 직업 구하기가 쉽지 않고 배우자 구하기도 힘들어졌기 때문.
게다가 남성들이 3, 4세 연하의 여성을 배우자로 선호하는 문화가 지배적이다 보니 나이 많은 고학력 여성 주변에서 ‘결혼할 만한 남자가 사라져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 게다가 심화되는 청년실업은 남녀 모두의 결혼 연기를 부채질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