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공포가 비디오 공포를 죽이고 있다.”
여름방학 대목을 앞두고 개봉했거나 개봉 예정인 국내외 공포영화에서 관객의 공포심리를 자극하는 것은 검은 머리 길게 늘어뜨린 사다코(‘링’)류의 귀신도, 피를 내뿜으며 뎅겅뎅겅 잘리는 목과 팔다리도 아니다. 공포의 주인공은 소리다.
1일 개봉한 한국영화 ‘분홍신’에서 공포의 모티브는 분홍신의 선명한 색감이 아니라 침침한 형광등 불빛의 긴 복도를 또각또각 울려대는 분홍신의 소리다. 영화를 만든 김용균 감독은 둔중한 소리보다는 신경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기 위해 영화에 나온 신보다 더 얇고 가는 굽을 가진 구두로 대리석 바닥을 두드린 뒤 수차례 음향을 믹싱해 원하는 소리를 얻었다고 밝혔다.
눈을 통해 들어온 영상이 뇌의 장면 분석 과정을 거쳐 공포라는 심리를 만들어낸다면, 소리는 듣는 순간 진동과 함께 몸에 흡수돼 더 즉각적으로 관객에게 각인된다.
공포영화에서 ‘영상에 대한 소리의 역전’ 현상은 국내외적으로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해 올해 커다란 분기점을 맞았다.
‘분홍신’ 외에도 최근 개봉된 태국영화 ‘셔터’, 미국영화 ‘텍사스전기톱 연쇄살인사건’, ‘우주전쟁’ 등에서 소리가 공포의 주요 모티브로 쓰였다. 곧 개봉할 한국영화 ‘여고괴담 4: 목소리’와 ‘첼로’는 아예 소리 자체가 주는 공포를 다뤘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씨는 “이제는 감각적이란 말의 의미가 시각에서 청각으로 옮겨가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귀에 거슬리고 진저리 쳐지는 소리는 관객을 파블로프의 개로 만든다. 관객들은 특정 소리가 들릴 때마다 조건반사적으로 오싹해진다.
‘셔터’에서는 귀신이 등장할 때마다 긴 손톱으로 철판을 긁는 듯한 ‘끼이이익’ 소리가 난다. ‘텍사스전기톱 연쇄살인사건’에서는 ‘윙’ 하는 엔진소리와 함께 그르릉그르릉거리는 스피디한 전기톱 소리가 60여 분 동안 관객의 귀를 자극한다. ‘우주전쟁’에서는 무자비한 ‘세 발 달린 살인기계(트리포드)’가 등장할 때마다 창에 찔린 매머드가 전기 확성기에 대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난다.
한국영화 ‘첼로’의 설정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음악을 듣는 일가족이 차례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제작진은 “첼로라는 악기를 선택한 것은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음색을 지닌 악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고괴담 4: 목소리’에서는 유령의 존재감을 소리로 드러낸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귀신이 된 사람이 잊혀질수록 원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과거에도 소리의 공포는 있었다. ‘월하의 공동묘지’(1967)류의 귀신은 ‘이히히히히’하며 시각적 설정과 어울려 천천히 관객의 가슴을 조여 왔다. 그러나 최근 공포영화에서 쓰인 소리는 매복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관객을 덮친다.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빠르다.
1990년대 후반 ‘소리의 공포’가 본격 등장하게 된 것은 녹음 및 음향 시설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하는 만큼 신경을 거슬리는 음을 만들고 증폭하기가 더 쉬워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시각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공포가 바닥났기 때문이라고 영화제작자들은 입을 모은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지금까지의 귀신은 시각적으로만 드러났는데 앞으로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있는 실체가 귀신이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