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여름 세일이 시작되면서 샤넬 등 명품 매장 앞에 고객들이 줄지어 있다. 파리에서는 여름과 겨울 한 달여 동안 거의 모든 브랜드가 세일에 들어간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파리에 살면서 ‘습관’이 하나 생겼다. 길을 가다 맘에 드는 옷이나 구두를 봐도 웬만하면 보기만 한다. 가격이 괜찮은 것 같아도 지갑을 열지 않는다. 몇 달만 참으면 되기 때문이다.》
여름과 겨울, 프랑스 전역에서는 각각 한 달 가까이 파격적인 세일(프랑스어는 soldes)이 실시된다. 지난해 여름 파리에서 처음 세일을 맞았을 때, 그 경이로움은 잊을 수 없다. 명품을 파는 고급 부티크부터 일상용품을 다루는 동네 슈퍼마켓까지 도시 전체가 세일에 나서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시작한 여름 세일은 필자에겐 3번 째이지만 기대와 흥분은 여전하다. 정상 가격과 할인 가격을 비교하거나 한국 판매가와 견주어 보는 게 늘 재미있다.
최근 파리의 부자들이 자주 찾는 봉 마르셰 백화점에 갔다. 마크 제이콥스의 빨간색 시폰 원피스가 눈길을 사로 잡았다. 240유로(약 30만 원). 345유로(약 43만 원)였던 옷이다. 바로 옆 시폰 소재 블라우스는 230유로(약 29만 원)였는데 160유로(약 20만 원)로 판매되고 있었다.
파리 지하철역 내에 설치된 스포츠용품 브랜드의 세일 광고판.
나비 날개처럼 가벼운 질감의 바네사 브루노 원피스는 185유로(약 23만 원)짜리가 130유로(약 16만 원)다. 중년 여성이 좋아하는 이세이미야케의 세컨드 브랜드 ‘플리츠 플리즈’의 주름 블라우스는 320유로(약 40만 원)였던 것이 160유로(약 20만 원)에 나왔다.
샤넬, 프라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페라가모 등 고급 브랜드 구두를 모아 놓은 매장 앞은 줄이 길게 늘어섰다. 내부로 들어올 고객의 수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브랜드 로고가 산뜻한 분홍색과 어우러진 디오르의 슬리퍼가 반값인 10만 원대에 팔렸다.
샤넬 구두도 30∼50% 할인됐다. 평소라면 매장만 기웃대다 돌아설 뜨내기 쇼핑객들도 부지런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맞는 사이즈가 없으면 신발에 발을 맞추겠다는 비장함마저 보인다.
하지만 인기 제품은 대부분 품절이다. 옆에서 물건을 고르던 이는 “세일 둘째날에 와서 직원에게 맞는 사이즈를 부탁했더니 한참 늦었다는 표정을 짓더라”면서도 연방 눈을 돌리고 있었다.
세일 첫날부터 갈르리 라파예트 백화점은 다양한 피부색의 관광객과 편한 차림의 파리지앵들로 붐빈다. 조르조 아르마니, 랄프 로렌 같은 고급 브랜드 의류들이 판매대 위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쇼핑객들은 그 옷더미 속에서 용케 자기 것을 골라내 계산대로 달려간다.
샹젤리제 거리의 중저가 의류 매장들에서는 더 큰 ‘소동’이 일었다. 자라, 베네통, 나프 나프, 모르간 같은 캐주얼 브랜드 의류들이 티셔츠 10유로(약 1만2500원), 샤넬풍 트위드 재킷 25유로(약 3만1000원) 등 30∼70% 할인된 가격에 판매됐다.
파리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대형 상설 아웃렛 타운 ‘라 발레’에서는 본격 세일 3일 전부터 ‘세일 전 할인’이 열린다. 페라가모의 플랫슈즈를 10만 원 이하에 구입할 수 있고 훌라의 다양한 핸드백을 5만원 대에 살 수 있다.
평소에도 정상 가격의 70% 선에서 고급 브랜드 제품을 살 수 있는 데다, 세일 기간에는 할인가에서 다시 30∼50%를 빼주기 때문에 세일 첫 주말 이곳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극심한 정체를 빚기도 한다.
올여름 파리의 세일은 23일까지. 알뜰한 프랑스인들은 세일 기간을 십분 활용한다. 지난해 세일 기간인 1월과 7월에 프랑스 전역에서 팔린 의류 제품은 1년 전체 판매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2000년 4분의 1을 차지한 데 비해 크게 늘어났다. 프랑스의 두 가구 중 한 가구는 세일을 기다려 물건을 산다고 할 만큼 이들은 세일에 ‘올인’한다.
이런 경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통계도 있다. 지난해 프랑스 여성들이 의류를 구입하는 데 쓴 비용은 모두 106억 유로(약 13조2500억 원). 2003년보다 0.4% 떨어졌다. 하지만 구입한 의복은 4억820만 벌로 오히려 4.2% 늘어났다. 소비자들이 세일을 적극 활용했다는 뜻이다.
파리지앵들은 세일 기간에 쇼핑을 많이 하지만 나름의 철학과 노하우로 충동구매를 피한다.
파리 시내 호텔에서 일하는 피에르 모소(27) 씨는 “백화점 VIP 카드로 10% 할인을 받고, 백화점에 근무하는 친구를 통해 추가로 15% 할인을 받아 헬뮤트 랭 재킷을 헐값에 샀다”며 “단골 브랜드에서는 세일 전 초대장을 보내주기 때문에 미리 원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일 기간 내내 뭔가 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갖기 싫어 원하는 1, 2가지만 구입하고 세일 기간 자체에 대해 잊어버리려 애쓴다고 덧붙였다.
세일은 소비자들도 환영하고, 대형 유통매장이나 백화점들도 재고 부담을 줄일 수 있어 반기지만 중소규모 의류 업자들은 불만이다. 특히 올해 4만9000개의 의류 업체가 가입한 프랑스 의류판매연합회(FNH)의 샤를 멜세르 회장은 다소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어깨를 드러내는 원피스나 반바지가 한창 팔릴 성수기에 왜 세일을 시작하느냐”며 “세일 시기를 더 늦춰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세일 기간을 지키지 않거나 세일용 물건을 따로 만드는 업체에는 1만5000유로(약 1875만 원)가 넘는 벌금을 매기는 등 강력히 규제한다.
한 해의 봄 여름 장사를 마무리하는 정기 세일이 한창인 7월 초, 이들 매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내년 봄 여름 유행을 미리 선보이는 남성복 패션쇼가 열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올여름을 마무리하고, 또 한쪽에선 다음 해 유행을 재촉하는 곳. 파리는 패션의 생산과 소비가 생물처럼 살아 있는 곳이다.
김현진 사외기자 kimhyunjin517@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