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눈감아 줘야 할 때가 더러 있다. 당장 싸우고 갈라서기보다는 상대가 뉘우치기를 기대하면서 길게 보고 참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7일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의 간담회에서 “남북문제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북한 수준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대화를 해 나가는 식으로 풀어야 한다”고 한 것도 이런 취지로 읽힌다. 노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지금의 남북관계 현실에 얼마나 들어맞을까.
‘6·17 평양 면담’부터 되짚어 보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유효하며 이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은 그보다 4개월 전인 2월 10일 이미 핵무기 보유 선언을 했다. 핵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그럴 이유가 없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아니면 보유 선언 자체가 거짓말이거나.
‘한반도 비핵화’ 대목은 거의 사술(詐術) 수준이다. 우리는 ‘핵’ 하면 ‘북한 핵’을 떠올리지만 북에 핵은 언제나 ‘한반도의 핵’이다. 남한의 핵 시설과 미국의 핵우산까지도 철폐 대상에 포함돼야 하는 ‘핵’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북한식 비핵지대화(denuclearized zone)다. 일반적으로 비핵화(denuclearization)는 ‘핵무기와 핵시설의 제조, 보유, 저장, 사용 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비핵지대화는 특정 역내(域內)에서 핵을 적재한 항공기나 선박의 영공 영해 통과와 정박까지도 불허하는 포괄적인 금지 규정을 말한다.
북한은 ‘평양 면담’ 전인 3월 31일 외무성 담화를 통해 그들이 말하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무엇인지를 밝혔다. 담화는 ‘한반도 비핵화의 3대 조건’으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전환, 남한의 핵무장 요소 제거, 한반도 주변에서의 미국의 핵 연습 중지와 핵 위협 공간 청산을 제시했다. 말 그대로 비핵지대화다. 이대로라면 미 핵 잠수함은 영원히 진해항에 들어올 수 없다.
남북 장관급회담도 마찬가지다. 북은 인심 쓰듯 비핵화 문구를 공동발표문에 넣도록 했지만 이때의 비핵화도 ‘한반도의 비핵화’, 곧 비핵지대화였음은 물론이다(발표문 제2항). 그런데도 우리 측은 흥분했다. “북핵 해결에 한국이 마침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는 분석과 기대가 쏟아져 나왔다. 오죽하면 정 장관이 회담 내용을 직접 설명하겠다며 “안 와도 된다”는 미국 측을 설득해 방미(訪美)까지 했을까.
나는 통일부나 국가정보원 사람들이 북한의 이런 회담 테크닉, 나쁘게 말하면 ‘꼼수’에 대해 모를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몰라서 당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정권과 관계없이 평생 북한만 들여다본 많은 전문가가 있는데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있다는 얘기다. 아니면 정치인 출신 장관의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을 방조했거나.
어쨌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북한은 9일 열리는 남북 경제협력추진회의에서 당장 식량 50만 t부터 달라고 할 텐데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소식은 아직 없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도 북한의 입장을 미국 측에 알리는 ‘대변인 역할’과 이른바 ‘중대 제안’을 통해 북한에 경제지원을 하는 ‘물주 역할’을 빼면 따로 할 일이 없다는 조소(嘲笑)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남북한 눈높이 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는 대북 포용정책에 반대하지 않는다. 화해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경제지원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언제까지 북한의 속내를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그것도 부족해 심기를 건드릴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아무래도 위선(僞善)처럼 느껴진다. 이른바 진보세력이라면 북한은 이렇게 다뤄야 한다는 허위의식의 발로라고나 할까. 머리 속에 이미 심어진 도식적 남북관계에 현실을 맞춰가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의 거짓말에 눈감아주는 것은 동기가 정말 순수하거나, 지금 한번 봐주면 앞으로 더 큰 선(善)으로 보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오늘의 북한이 과연 그런가.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