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창문을 열어 놓고 타파넬과 고베르의 플루트 스케일 연습곡 4번과 마주했다. 플루트를 하는 사람에게는 ‘고전’이라 불리는 곡이다. 벌써 10여 년째 연습 중이다.
아파트 단지 전체가 갑자기 정전이 됐다. 양초를 찾지 못해 어둠 속에서 다시 악기를 들었다. 막연했다. 방금 연습한 부분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연주를 해서 그런지 더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변화 없는 16분음표뿐인 곡의 연습이 이날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눈금종이 같았던 음표들이 조금씩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점들이 점점 움직이며 점묘화의 대가 쇠라의 그림처럼 은은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악보를 볼 때마다 그림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다. 어릴 적 ‘바를 정(正)’ 자를 그려가며 세던 음표들. 똑딱똑딱 빠른 속도로 박자기를 틀어 놓고 무슨 운동연습 하듯 틀에 맞추어 넣던 딱딱한 음표들이 이제는 풍성한 회화적 이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악보상의 포르테(세게)와 피아노(약하게)는 단순한 강약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하고 여림, 풍성함과 소박함, 쏟아지는 강렬함과 흩어지는 희미함으로 받아들여졌고, 고흐와 모네의 색채로 다가왔다.
이때 음악은 미술과 소통한다. 곡의 해석자인 연주가의 내적 심상에서 생기는 회화적 이미지가 청중에게 생동감 있게 전달될 때 음악은 훨씬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가끔 몇몇 현대작품의 악보를 보면 음표, 박자, 음 길이 등이 아주 자유롭게 쓰여 있다. 작곡자들은 연주자들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음악적 느낌을 충분히 살려주길 원한다. 하지만 이것도 작곡자의 의도를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 때의 이야기다. 악보만을 따라 연주할 때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생각하기 힘들어진다.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악보에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져 있음에도 오히려 그 자유가 제한되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회화적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로크의 플루트 소나타에서는 악보 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음표들이 마디마디 연결되어 가면서 훨씬 더 풍요로운 화성과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음표들의 간격이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어야 ‘여백의 미’도 생긴다. 그 여백 속에서 상상이 우러나온다. 오랜 시간의 연습은 바로 샘물이 흐르거나, 높은 산을 힘겹게 오르는 등 자연에서 일어나는 정경이나 일을 곡의 흐름에 반영시키는 작업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학생들을 지도해 보니 이 정도 수준의 테크닉에 오르는 데 적어도 10년 이상의 고단한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자연스러운 음악이 나오려면 연주자의 역량에 맞는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주어진 악보에 끝없는 연마가 바탕에 깔려야 한다. 여기에 악보를 회화적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 영감이 어우러지면 화룡점정(畵龍點睛)일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음악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아마 모든 교육 과정이 그러하고 사회제도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위대한 작곡가들이 오케스트라 구성원의 음색과 하모니를 고려해 명곡을 만들듯,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특성을 심사숙고해 일관성 있는 조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선율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사회를 이루는 첫발이지 싶다.
연주자들이 한 곡을 수백 번 수천 번을 연습하듯, 사회 구성원들도 조화를 이루려는 연습과 노력을 쉼 없이 해야 할 것이다. 조화로움이 몸에 밴 사회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사회일 테니까.
이주희 경희대 겸임교수·플루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