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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793년 佛혁명가 마라 피살

입력 | 2005-07-13 03:33:00


“밤을 지새웠던 나의 기도, 나의 노력, 나의 곤궁, 나의 고통. 내가 처했던 위험을 보라. 나는 당신들의 분노에 용감히 맞서기 위해 당신들 가운데 계속 머물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이 공포정치로 치닫던 1792년 9월 로베스피에르, 자크 당통, 장폴 마라 등 급진주의적 산악당의 세 거두 중 한 명이었던 마라가 “산악당이 독재체제를 도모하고 있다”는 지롱드당의 비난을 맞받아치면서 한 연설이다.

이런 투쟁적 결의를 밝혔던 마라는 1789년 7월 프랑스혁명이 터졌을 때 ‘민중의 벗’을 창간하는 등 민중에 기초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스위스 뇌샤텔에서 태어나 프랑스 보르도와 영국 런던에서 의술을 배웠던 그가 1792년 민중봉기로 성립한 파리코뮌을 이끌며 감옥에 갇혀 있던 1200여 명의 귀족과 성직자를 살해한 ‘9월의 학살’을 배후조종한 것도 이런 이념 때문이었다.

잔인하고 냉소적인 성격을 지녔던 그는 모든 특권층이 사라지고 기층 민중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사회를 프랑스의 미래로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과격은 항상 과격을 불러오는 법. 당통은 한때 동지였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대로 보내졌고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펼치다 민중이 등을 돌리는 순간 단두대에 올라야 했다. 이들이 죽기 1년여 전인 1793년 7월 13일 마라는 파리 한복판의 자택 욕조에서 암살자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저는 아주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당신이 제게 호의를 베풀어줄 이유가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라는 메모를 들고 온 스물다섯의 지롱드당 지지자인 시골처녀 샤를로트 코르데를 민중의 벗을 자임해 온 그가 기꺼이 만나준 게 최후가 됐다. 그의 나이 49세.

지롱드당을 탄압하는 혁명지도부에 겁을 주려 했다는 게 암살 이유였지만 마라의 죽음은 산악당이 애국주의를 앞세워 ‘단두대 정치’를 공공연하게 펼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 죽음의 장면은 혁명동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유화 ‘마라의 죽음’으로 3개월 뒤 재현돼 ‘혁명의 피에타’로 불리며 회화사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마라 자신은 그가 꿈꾼 ‘유토피아’ 대신 ‘독재자’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김동철 정치전문기자 eastph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