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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수형]게으름에 대한 참회 또는 찬양

입력 | 2005-07-13 03:40:00


A는 B회사의 평범한 직원이다.

A는 좀 게으르다. 그에게는 남들에게 넘치는 열정 같은 것이 별로 없다. 정력적이지도 않다. ‘다걸기(올인)’라는 말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다행히 그에게도 크지는 않지만 약간의 ‘권력’ 비슷한 것이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부탁을 하는 때보다 부탁을 받는 때가 많고, 식당에서 밥값을 내는 적보다 얻어먹는 적이 더 많다.

3년쯤 전 회사 일로 외국에 출장 갔을 때 A는 서울의 가족에게서 급한 전화를 받았다. 부친이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A의 가족은 A에게 아는 병원이나 의사가 있으면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병원에 가서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무런 백도 없이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서 소홀히 대접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전했다.

A가 출장지에서 그 전화를 받은 것은 자다가 깬 이른 아침. A는 아침에는 더 게으르다. 가족의 서운함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의 게으름을 이겨 내긴 어려웠다. A는 가족의 전화에 답했다. 약간의 짜증과 함께.

“그냥 가 보셔도 될 텐데….”

부친은 그냥 병원에 갔고 그럭저럭 치료를 잘 받아 완쾌됐다.

A는 최근에 친구 C를 만났다. C는 영화 배급사의 마케팅 이사인 커리어 우먼. 그는 마흔이 가깝도록 혼자 살다가 지난달 결혼했다. 남편 D는 큰 병원의 유명한 의사. A가 D를 만난 곳은 이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A는 C에게서 D를 소개받아 이야기를 나누다 D가 자신의 부친 담당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A는 D에게 부친 이야기를 했다.

며칠 후 A는 다른 일로 C를 또 만났다. C가 말했다.

“남편이 진료실에서 당신 아버님 차트를 꺼내 보고 나서 당신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하던데.”

“…….”

C의 설명은 이랬다. D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힘 좀 쓰는 사람은 이런저런 민원을 통해서 병원에 온다는 것이다. 권력 비슷한 것이 있는 사람의 사돈의 팔촌도 대개 그렇게 알은척하며 온다고 한다. 병원의 급행료(料)는 사라졌지만 급행력(力)이 생겼다고나 할까. 병원이 클수록, 의사가 유명할수록 심하다고 한다.

그런데 A의 부친은 아무런 전화나 민원도 없이 평범하게 응급실을 통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걸 보고 D는 A가 부탁 같은 것을 모르고 원칙대로 사는, 인격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A는 그 얘기를 듣고 잠시 고민했다.

‘사실은 게을러서 그런 것이었는데. 사실대로 말할까….’

그러다 그냥 헤어졌다. 그런 해명을 할 만큼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A는 ‘힘없이 사는’ 좀 괜찮은 사람이라는 얘기가 주변에 퍼졌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A는 생각했다. 자신은 게으름에 대해 참회하는데 사람들은 그의 게으름을 찬양하다니….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