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그때 한왕 유방의 처지가 그랬다. 번쾌는 몇 달째 광무 산성(山城)에 갇혀 있고, 조참과 관영 주발은 모두 조나라로 가 대장군 한신의 부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처 그런 한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남쪽에서 부옇게 먼지가 일며 군사 한 갈래가 다가왔다.
“저게 어디 군사냐?”
한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그렇게 묻자 이졸 하나가 살피러 달려갔다. 그때 한왕 곁에서 가만히 살피고 있던 장량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말했다.
“대왕께서는 크게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초나라 군사 뒤꼬리 쪽이 흐트러지는 걸로 보아 오는 것은 아마도 형양성에서 나온 주가와 종공의 군사들 같습니다.”
그 말에 한왕도 가만히 살펴보니 정말로 초군 뒤편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었다. 달려오는 군사들이 앞세운 깃발도 붉은색을 위주로 한 것이 틀림없이 한군(漢軍)이었다.
그렇게 되자 앞뒤로 적을 맞은 꼴이 난 종리매의 장졸들이 이내 크게 흔들렸다. 종리매가 큰 칼을 휘두르며 용맹을 자랑했으나 무너지는 기세를 되살리기에는 어림없이 모자랐다. 아래위를 가리지 않고 움츠러들며 달아날 곳부터 봐두었다.
그런 초나라 장졸들과 달리 한왕의 군사들은 원군이 이른 걸 보고 사기가 크게 되살아났다. 함성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힘을 다해 몰아붙였다. 거기다가 다시 등 뒤에서 주가와 종공이 이끄는 군사들이 지르는 함성이 들리자, 마침내 초나라 군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쳐라! 종리매를 사로잡고 싸움을 끝내자.”
“초나라 군사들은 항복하라! 우리 대왕께서 너희들을 너그러이 살펴주실 것이다.”
적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더욱 기세가 오른 한군이 그렇게 외치며 사방에서 종리매의 군사들을 몰아붙였다.
종리매가 마지막으로 기운을 짜내 전세를 바꿔보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무기를 내던지고 항복하거나 달아나는 군사들이 벌써 태반이었다.
“모두 물러나라. 물러나서 다시 뒷날을 기약하자!”
마침내 종리매가 말머리를 돌려 세우며 그렇게 외쳤다. 대장이 그렇게 달아나니 그 아래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3만을 일컫던 종리매의 군사들은 여지없이 무너져 가을바람에 낙엽 쓸리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종리매의 대군을 깨뜨린 뒤 형양성 밖에서는 오래 서로를 걱정해온 임금과 신하 간의 감격스러운 만남이 있었다. 주가와 종공이 찾아와 군례를 올리자 한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장군을 다시 보니 못난 과인이 실로 부끄럽구나. 그동안 고초가 컸을 것이다.”
“실로 부끄러운 것은 살아남은 저희들입니다.”
주가와 종공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받으며 기신(紀信)의 참혹한 죽음을 전했다. 한왕도 기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미 과인을 살렸거니, 만약 그대들이 항왕에게 이 형양성을 내주고 기신을 살렸다해도 공은 이룬 것이었을텐데…. 이까짓 성이 무엇이기에 아까운 장수 하나를 죽이고 두 장군까지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냐!”
그리고 성안으로 들어 군신이 술잔을 나누며 하룻밤 회포를 푼 뒤, 형양성은 전처럼 주가가 종공과 한왕(韓王) 신(信)을 데리고 지키게 하고 한왕은 성고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