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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서]헌법학자 빠진 ‘개헌학술대회’

입력 | 2005-07-16 03:06:00


15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하여’란 제목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진보적 시민단체인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출판사인 ‘창비’가 공동주최한 이 행사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개헌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첫 학술행사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聯政) 공론화 발언으로 향후 정계 개편과 개헌 문제의 연계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이어서 이날 행사가 정치권과의 일정한 교감 아래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행사가 최근의 여권 움직임에 발맞춰 급조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날 논문을 발표한 홍윤기(철학) 동국대 교수, 박명림(정치학) 연세대 교수 등은 1년여 전부터 이 문제를 준비해 왔다. 이들은 9차례 개정된 헌법 조문을 꼼꼼히 읽고 유럽연합(EU)과 스위스 헌법까지 분석했다고 한다.

발표자들은 1987년 민주화의 성과인 현행 헌법이 정작 그 민주화의 주체인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현행 헌법이 통치의 대상으로서 국민을 바라보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정치권의 개헌 논의가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춘 것도 비판했다.

특히 박 교수는 “1987년 헌법 개정은 시민사회를 배제한 채 정치엘리트 사이의 막후 거래로 이뤄졌다”며 “이번에는 권력 구조만 뜯어고치는 헌법 개정이 아니라 시민적 합의가 반영되는 헌법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탄핵 사태와 수도 이전 문제에서 보듯 헌법은 이제 저 높은 곳에 장식된 정치적 상징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는 구체적 잣대가 됐다. 따라서 (만약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면) 그 과정에 시민들의 적극적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주최 측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날 행사는 단순한 학술행사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 행사를 비롯한 진보진영 학자들의 개헌 관련 움직임은 현재 잠복해 있는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최 측이 이날 행사의 중심에서 헌법학자들을 배제한 채 진보진영 위주로만 끌고 간 점은 아쉽다. 헌법학자로 유일하게 토론자로 참석한 이국운 한동대 교수도 “수많은 세월을 거치며 우리 헌법에 담긴 층층의 고민을 읽어내지 못한 채 술자리에서 떠들 듯이 섣불리 말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발제자들은 “100년을 갈 수 있는 헌법을 만들자”고 말했다. 그러나 헌법이 시대적 변화상을 담아내지 못하며, 헌법전문에 특정 역사사건이 빠졌다고 비판한다면 헌법은 계속 뜯어고쳐야 한다. 또 현재의 이념적 대립 상황에서 헌법에 새로운 가치를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칫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 교수의 말처럼 헌법이 한국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같음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의 최대치가 아니라 그 최소치가 돼야 하는 것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