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러시아의 ‘블록버스터 황제’인 강제규 감독(왼쪽)과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은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관객을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연출관을 공유한다. 강 감독은 생각이 너무 같은 베크맘베토프 감독을 두고 “마치 나 자신을 거울로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변영욱 기자
《강제규(43) 감독과 티무르 베크맘베토프(44·러시아) 감독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지난해 ‘태극기 휘날리며’로 1200만 관객을 모은 강 감독은 1998년 ‘쉬리’로 그해 세계 최고 흥행작인 ‘타이타닉’을 한국시장에서만큼은 앞질렀다. 베크맘베토프 감독도 지난해 자신이 연출한 판타지 스릴러 ‘나이트 워치’로 러시아에서 500만 관객을 불러 모아 세계 흥행 1위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의 관객 수를 가볍게 제쳤다. 두 사람 다 1990년대 중반 감독으로 데뷔해 지금까지 3편의 작품을 만들었고, 내년에 미국 할리우드에 입성할 계획인 것도 같다. 얼굴 크기마저 비슷한 두 나라의 ‘블록버스터 황제’가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강 감독 작업실에서 7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의 만남은 14일 시작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에 ‘나이트 워치’가 개막작으로 초청돼 내한한 베크맘베토프 감독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베크맘베토프 감독은 가장 인상적인 한국 영화로 ‘쉬리’를 첫손에 꼽았다.》
▽베크맘베토프=모스크바 거리에서 무엇에 끌렸는지 ‘쉬리’ 불법DVD를 사서 봤다. 처음 본 한국영화였는데 2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강제규=고맙다. ‘나이트 워치’는 이야기나 판타지 스릴러라는 장르, 컴퓨터그래픽(CG)을 많이 사용한 방식 등이 기존 러시아 영화와 상당히 다르다.
▽베크맘베토프=러시아적인 전통과 역사를 담되 표현수단은 전혀 러시아적이지 않은 판타지를 사용했다. 새로운 영화 언어를 알고 있던 젊은 층에 잘 먹혔다. 그동안 러시아에 판타지 영화가 없었던 것은 공산주의 자체가 끔찍한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스탈린 1인이 뭘 먹고, 뭘 입고, 뭘 할지 대중의 생활양식을 결정했다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판타지다. 북한도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한다.
6·25전쟁이 한 가족과 연인에게 남긴 상흔을 전쟁 액션에 버무린 ‘태극기 휘날리며’. 1200만여 명이 관람해 한국 영화 사상 최대 관객이 몰려든 블록버스터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강=‘나이트 워치’는 기존 러시아 영화와 전혀 다르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본다. ‘쉬리’의 성공도 마찬가지였다. ‘나이트 워치’가 러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우리 일처럼 기뻤다. ‘쉬리’ 이후 한국 극장가에서 한국영화의 관객점유율이 높아지고 새로운 문법의 한국영화가 생겨났던 것처럼 ‘나이트 워치’가 러시아 영화계에 비슷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크맘베토프=어젯밤 숙소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강 감독이 부러웠다. 자신의 메시지를 남김없이 다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태극기 휘날리며’가 러시아에서 만들어져 개봉됐다면 ‘나이트 워치’의 2배 이상 흥행에 성공했을 것이다.
▽강=‘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이 규모가 큰 영화를 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내 표현 영역을 더 넓히기 위해서다. 상업적 성공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중세 때의 결전 이후 휴전한 빛의 기사들과 어둠의 기사들이 현대에 다시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의 판타지 스릴러 ‘나이트 워치’. 국내에 서는 9월 개봉 예정. 사진 제공 포미커뮤니케이션 ▽베크맘베토프=나도 같은 생각이다.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관객을 재미에 빠뜨리고, 무서움에 떨게 하며, 울게 만드는 감동이다.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만을 생각한다. 최근 20년 간 러시아영화의 문제점은 감독들이 관객이 아니라 유럽의 영화제들을 겨냥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강=러시아뿐만 아니라 대만과 유럽 각국 영화의 침체도 같은 이유다. ‘내 영화를 유럽 영화제나 평론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러시아 감독을 만나 행복하다. 생각이 나와 너무 똑같아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다.(웃음)
▽베크맘베토프=내년에 미국에서 두 가지 프로젝트를 한다. 우선 미국 배우들을 써서 판타지 스릴러를 만들 예정이다. 또 미국의 젊은 감독이 만드는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할리우드는 ‘신선한 피’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들도 우리의 경험이나 그들이 갖지 못한 창의력 등을 필요로 한다. 미국 20세기폭스사와 일하게 됐는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약속을 받아 냈다. 할리우드에 가더라도 내 고유의 것을 지키는 것, 이것이 원칙이다.
▽강=현재 미국의 한 제작사와 공동제작으로 SF영화를 추진 중이다. 8월 말 경 시나리오가 끝나면 미국 배우들을 캐스팅해 연말에는 제작에 들어간다. 단순하게 할리우드에서 감독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다. 주된 관심은 오직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게 할리우드라면 같이 한다는 거다. 예전에는 제작 메커니즘이나 테크놀로지 등에서 할리우드만이 갖는 특권이 있었지만 디지털시대로 오면서 해체됐다. 지금은 창의력 있는 사람이 주인이다. 영화제작도 마찬가지다.
▽베크맘베토프=당신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강=내년에 할리우드에서 시간 나면 가끔 만나자.
▽베크맘베토프=기다리겠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