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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서정보]뒤늦은 X파일 보도… ‘부끄러운 MBC’

입력 | 2005-07-23 03:05:00


22일 밤 ‘뉴스데스크’를 지켜보는 MBC 기자들의 표정은 착잡했다. MBC는 이날 그동안 소문이 무성했던 이른바 ‘1997년 대선자금 관련 X파일’의 전모를 무려 20개의 리포트를 통해 단독 보도했다. 하지만 많은 기자들은 특종이 아니라 낙종이라고 아쉬워했다.

MBC 노동조합은 이날 오후 ‘부끄러운 MBC, 조합은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합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노조는 성명에서 “국민들의 알권리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언론의 사명을 저버리고 통신비밀보호법에 스스로를 옭아맸던 모습을 통렬히 비판한다”고 지적했다.

MBC가 이 테이프를 입수한 것은 올해 초. 그러나 MBC 보도국은 보도 불가 방침을 정했다. 테이프 내용의 폭발력은 인정하지만 제작과정이 불법이어서 통신비밀보호법에 저촉된다는 이유였다.

MBC가 망설이는 사이 테이프에 관한 소문이 알음알음 새어나왔고 다른 언론사들이 자체 취재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해 갔다. 그러나 MBC는 당초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 때문에 MBC가 문제의 대화를 나눈 당사자가 몸담은 대기업과 또 다른 당사자를 고위 관료로 앉힌 현 정부의 눈치를 본다는 추측이 무성했다.

결국 MBC가 갖고 있는 녹음테이프가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도청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다른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당황한 MBC는 21일 ‘뉴스데스크’에서 녹음테이프를 공개하기로 했으나 홍석현(洪錫炫) 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李鶴洙)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하자 또 한 번 주춤했다. MBC는 이날 5개의 리포트를 했으나 정작 테이프 내용을 다룬 보도는 1분 30여 초에 불과했다.

같은 시간 KBS는 ‘뉴스 9’에서 자체 입수한 녹취록을 통해 대선자금 지원 액수와 방법, 대기업의 고위 검찰 간부 관리, 대기업의 자동차 그룹 인수 공작 등 알짜배기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MBC로선 1보에 이어 2보마저 경쟁 방송사에 빼앗긴 셈. KBS 관계자는 “MBC가 그렇게 약하게 보도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언론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치자금 전달 창구역을 하며 선거에 직접 관여한 언론사주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국민의 알권리와 실정법 사이에서 망설였던 MBC의 모습도 아쉬웠다.

서정보 문화부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