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지휘자 마린 앨솝(48)이 최근 미국 볼티모어 교향악단 차기 음악감독으로 임명됐다. 축하와 덕담, 샴페인이 어울리는 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오가는 말이 심상치 않다.
“악단 이사회가 너무 일찍 결정을 내렸으며 이 과정에서 단원들의 의견은 고려되지 않았다.” 90%가 넘는 서명을 받았다는 단원들의 성명서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단원들은 불필요한 말이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하고 있다. ‘여성 지휘자를 반대한 성차별주의자들’이라는 비난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려는 전략이 아닐까. 그렇다. 알솝은 미국의 메이저급(실력을 인정받는 1급의) 오케스트라에 음악감독으로 진출한 첫 번째 여성인 것이다.
단원들은 한스 그라프, 비아르테 엔게세트, 후안호 메나 등 다른 지휘자들도 후보에 올려 놓고 폭넓게 골라 보자고 요구했다. 기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그라프 외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반면 앨솝은 2003년 그라머폰상 ‘올해의 음악가상’을 받은, 떠오르는 거물이다.
앨솝에게 ‘지휘자로서의 인정투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줄리아드음악원 지휘 전공으로 입학이 거부되자 그는 직접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지휘 실습을 해야 했다. “아직도 여성이 진출 못한 분야가 많잖아요. 우리는 불합리한 관행들을 넘어설 겁니다.” 앨솝의 임명 제일성(第一聲) 또한 호락호락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사실 21세기에 와서조차 여성 지휘자를 놓고 이런 소란이 벌어지는 것은 의아하다. 1950년대 이미 프랑스의 여성 음악교육가였던 나디아 불랑제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대에 올랐다. 지난해 타계한 아이오나 브라운은 1970년대 네빌 마리너와 더불어 실내악단 ‘성(聖) 마틴 인 더 필즈 아카데미’의 지휘대에 서서 인상적인 연주를 남겼다. 그 역시 ‘카리스마 강한’ 남성을 찾는 음악계의 완고함 때문에 여러 차례 ‘남자가 되었으면’하는 소망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여성 음악학자 민은기는 저서 ‘음악과 페미니즘’(음악세계·2000년)에서 사회적 가부장제 때문에 고초를 겪었던 수많은 여성 음악가의 모습을 조명한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여성은 ‘정숙하지 못해 보인다’는 이유로 첼리스트와 플루티스트가 될 수 없었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그러나 지금은 2005년이 아닌가.
최근 기자가 만난 중국 상하이 필의 한국인 여성 부지휘자 이선영 씨는 “지휘 공부를 했던 프랑스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는 중국이나 캐나다에서도 성차별을 의식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볼티모어 교향악단의 음악가들은 ‘앨솝 반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밝혔어야 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성명을 철회하든가. 음악 팬의 한 사람으로서 클래식계가 ‘괴상한 집단’으로 치부될까 두렵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