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경쟁6자회담 이틀째인 27일 오후 중국 베이징의 주중 북한대사관 앞에서 각국 취재진이 북한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태운 자동차가 지나가자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베이징=연합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입장 차이가 27일 이틀째 열린 6자회담 전체회의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날 각국 수석대표의 기조연설에서 북한은 예상대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지난해 6월 3차 6자회담 때 내놓은 제안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대표단의 표정은 별로 어둡지 않았다. 북-미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강한 협상 의지를 보인 데서 희망의 단초를 찾는 듯했다. 협상은 서로 차이를 드러내 놓고 이를 좁혀가는 과정인 만큼 6자회담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국 측 수석대표인 송민순(宋旻淳)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기조연설 후 남북 접촉을 갖고 우리 제안의 취지와 배경, 북측 제안의 의미 등에 대해 상세하게 짚어가며 이야기했다”고 말해 협상이 진척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분명해진 쟁점들=한반도 비핵화가 회담의 목표라는 데는 6개국 모두 이의가 없었으나 비핵화의 의미에 대한 이들 국가의 해석은 출발부터 평행선을 달렸다.
북한은 미국의 핵위협 제거 및 남북한의 비핵지대화를 북핵 폐기와 같은 차원의 문제로 제기했다. 기조연설에서는 ‘남한의 핵무기 철폐 및 외부로부터의 반입 금지’와 ‘미국의 핵우산 제공 철폐’를 명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주한미군의 핵 의심 시설에 대한 사찰 요구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한미동맹의 문제라며 북한이 간섭할 사항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미 등 참가국들은 일관되게 ‘북핵 폐기’를 요구하고 있어 북한과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북한이 폐기 대상으로 ‘핵무기 및 핵무기 계획’만을 명시한 것은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방증이다. 이는 ‘모든 핵 프로그램의 폐기’라는 미국의 요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평화공존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와 무조건적인 핵 불사용 담보라는 북한의 요구도 미국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안전보장의 문서화는 물론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 나아가 현행 정전협정 체제의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까지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3차 6자회담에서 밝힌 ‘6월 제안’을 북한이 단칼에 거부한 것도 걸림돌이다. 한미는 이를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른 단계적 핵 폐기 방안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북한은 ‘선(先) 핵 폐기’ 강요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이 거론한 북한 미사일 및 인권 문제도 협상이 거의 불가능한 쟁점이다. 이는 북한이 문제 삼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과 맞바꿔 의제에서 함께 제외시키기 위한 협상용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미, 자극적인 표현은 서로 자제=북한과 미국은 북핵 문제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용어는 애써 피해갔다. 협상의 판을 깨지 않으려는 의지와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다’거나 이를 바탕으로 한 핵군축회담 주장을 명시적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평화적 핵 이용 권리도 에둘러 주장했을 뿐이다. 직설적인 표현을 애용해 온 북한으로서는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했다는 평이다.
핵 폐기의 조건으로 제시한 ‘평화공존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라는 표현도 평화협정이나 북-미 불가침협정에 대한 미국의 거부감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측은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을 ‘chairman(위원장)’으로 호칭한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종전의 ‘Mr.(선생)’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
북한이 강하게 반발하는 고농축우라늄(HEU) 문제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CVID)의 핵 폐기’라는 표현도 직접 쓰지는 않았다. 그 대신 미국은 ‘모든 핵 프로그램’ ‘효과적 검증을 수반한 폐기’라는 간접 표현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공동 합의문은 나올 듯=이날 기조연설의 최대공약수는 ‘공동 합의문 작성에 대한 공감대’이다. 6개국 모두 이번 회담에서 이것만큼은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후문이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이는 북한이 핵 폐기를 약속하면 다른 나라들이 보상을 약속하고, 핵 폐기 조치를 취하면 경제지원과 안전보장 등에 나선다는 것.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는 한반도 비핵화 목표와 ‘핵 폐기 대 보상’ 원칙을 천명하고 폐기 과정 및 보상의 내용을 열거하는 수준에서 공동 합의문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핵 폐기의 어느 단계에서 무엇을 얼마나 지원하느냐는 구체적인 문제는 다음 회담으로 넘길 듯하다.
베이징=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