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 주미 대사는 사의 표명 다음날인 26일(현지 시간) 대사관 간부들과 오찬 모임을 갖는 등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일본어로 ‘아리카타’를 강조한 적이 있다. 뭐랄까. 승부의 세계에서는 승부사다운 모습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퇴의사를 밝히고 26일 미국 워싱턴 대사관에 출근한 홍석현(洪錫炫) 주미 대사는 한국 특파원들과 잠깐 몇 마디를 나눈 뒤 대사관의 공사급 간부 5명과 오찬을 함께했다. 위성락(魏聖洛) 정무공사, 최종화(崔鍾華) 경제공사, 오수동(吳洙東) 공보공사 등이었다.
홍 대사는 특파원들에게 “내 얼굴 좋지 않으냐”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오찬 모임에서 있었던 홍 대사의 ‘말 한 토막’을 전했다. 홍 대사가 “지금까지 동서화합, 남북화해를 위해 노력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이런 부분에 역할을 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홍 대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직책’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홍 대사는 3월 몇몇 특파원들과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간담회를 가졌을 때 햇볕정책에 대한 소신을 언급한 적은 있다. 하지만 26일 오찬 모임에서처럼 ‘동서화합 및 남북화해를 위한 역할’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었다.
일각에서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김우식(金雨植)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홍 대사의 사의 표명 사실을 보고받고 “중요한 시기에 원만하게 업무 수행을 해왔는데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한 대목을 주목하는 분위기다. 노 대통령과 홍 대사를 이어주는 끈이 이번 일로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홍 대사는 이날 오찬석상에서 ‘X파일’ 사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토로하고 아쉬움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대사는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자금 전달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한 것을 자신의 업보이자 허물로 얘기했다고 대사관 관계자는 전했다.
홍 대사는 “1997년 상황에 대해 깊은 반성을 했고, 이후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3월 특파원 간담회에서도 “1997년 대선 때 나는 이회창 후보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1999년 사건(탈세조사)도 그 인과응보로 보고 있다. 그게 하나의 교훈이 됐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홍 대사는 “지금 X파일에서 거론된 ‘상황’은 1999년 탈세혐의로 구속된 이후에 벗고 나온 ‘허물’을 겨냥한 것인 만큼 거듭 태어난 나의 지금 실존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홍 주미 대사는 27일 6·25전쟁 정전협정 서명 52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함으로써 공식적인 외부 활동을 재개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