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거사 청산/안병직 외 10인 지음/439쪽·1만8000원·푸른역사
일찍이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말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미래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한다.”
과거를 지배한다는 뜻은 과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엇을 기억할 것이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를 선택할 힘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국가차원의 기억관리다. 어떤 기억은 신화로 조각되고 어떤 기억은 망각의 늪에 버려진다.
선택되는 기억은 항상 현재의 정치권력의 강화에 복무하는 기억이다. 버려지는 기억은 그렇지 못한 기억이다.
‘과거사 청산’이란 용어에는 2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 첫째는 국가의 선별작용을 통해 철저히 잊혀졌던 기억의 복권이다. 둘째는 이렇게 복원된 기억에 대한 성찰이다. 성찰은 기억의 복원에 작용하는 현실 권력의 작용을 발견하는 것이고, 새로운 기억의 신화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 책은 ‘과거사 청산’을 신화화하려는 조류에 대한 저항이다. 이 책은 안병직 서울대 교수를 좌장으로 11명이 참여한 2002∼2004년 ‘역사와 기억-과거청산과 문화정체성 문제의 국가별 사례연구’라는 학술프로젝트의 성과물이다.
20세기 독일 프랑스 스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칠레 러시아의 과거사 청산을 추적한 이 책의 결론은 ‘과거사 청산에 우리가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준거나 모델은 없다’이고 ‘과거사 청산은 늘 미완의 과제’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과거사 청산의 모범사례로 각인된 프랑스와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전범자 처벌은 피상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제론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2차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은 자의적 기준으로 인해 새로운 인권탄압의 문제를 제기했다. 독일군과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삭발케 한 뒤 거리를 걷도록 하고, 초법적 인민재판 형태로 1만 명가량을 즉결처형한 그들이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는지 이 책은 의문을 던진다. 그들의 나치 부역자 처벌은 나치 정책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대다수 프랑스인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기 위한 ‘희생양 만들기’였으며, 극소수였던 레지스탕스의 신화화와 그를 통한 드골 정권의 영광 창출을 위해 이용됐음이 폭로됐다.
독일의 과거청산 역시 나치에 가담한 대다수 독일 국민의 죄의식을 씻어 주기 위한 집단 방어행위였다.
반면 프랑코 독재시대의 고문과 학살행위에 대해 집단적 망각을 택한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방식을 반드시 실패사례로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저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스페인의 ‘망각협정’은 끔찍한 기억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 경우 정치적 파국을 우려한 스페인 국민의 집단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과거사 청산 역사를 통해 진정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역사의 교훈’이니 ‘민족정기의 회복’이니 하는 명분 아래 숨어 있는 정치적 의미를 깨닫는 것이며,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을 누리며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도덕적 오만함에 대한 성찰이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