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이맘때, 평론가 바이올리니스트 공연기획자 음반기획자 등 몇몇 사람에게 ‘휴가지에 들고 가고 싶은 음반’을 물었다.
다양한 답이 쏟아졌다. 드뷔시 교향시 ‘바다’, 헨델 ‘물 위의 음악’, 멘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 ‘한여름 밤의 꿈’, 로드리고 기타협주곡 ‘아란후에스’ …. 굳이 분류하자면 ‘물’이나 ‘밤’, 또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 ‘남부 유럽’과 관계된 답이 많았다.
기자의 휴가지 음반 선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목에 ‘물’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슈베르트의 즉흥곡집 D 899는 물이 가져다주는 온갖 환상을 안겨준다. 푸른 이파리를 따라 구르는, 강을 따라 출렁이는, 샘에서 투명한 햇살을 반사하는 물의 다양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남부 유럽이라면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하얀 여름햇살을 연상시키는 비제 ‘아를의 여인’ 모음곡이 제격일 것이다.
‘밤’이라면 어떨까. 기자에게 여름밤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초원지대를 떠올리게 한다. 땅거미가 어둑하니 질 무렵, 대상(隊商)의 무리가 지평선 저쪽에 서서히 모습을 나타낸다. 모닥불을 피우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린다. 이런 초원지대의 정경을 잘 표현했던 작곡가가 알렉산드르 보로딘이다.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를 비롯한 그의 작품에는 끊임없이 건조 지대의 유목민과 접촉했던 러시아인의 호기심이 짙게 반영돼 있다.
그의 미완성 오페라 ‘이고리 공’은 1185년 노브고르드 공(公) 이고리가 유목민족인 폴로베츠 족을 정벌하러 갈 때의 일화를 그리고 있다. 정벌군의 수장인 이고리 공은 폴로베츠족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밤이 오자 적의 족장은 사로잡힌 이고리 공에게 남녀 노예들이 추는 이국의 춤과 노래를 보여준다. 유명한 ‘폴로베츠인의 춤’이다.
이 장면을 들을 때면 장정일 시인의 시 ‘쥐가 된 인간’이 떠오르곤 한다. ‘그들의 왕이 자신에게 대적한 인간을/얼마나 자랑스럽게 벌주는가 찬양하며/저녁 쥐들이 춤을 춘다. 장작불 곁에서/처녀쥐의 경쾌한 박자에 밟히며/꿇어앉은 나의 그림자도 춤춘다.’
그러나 기자에게 누군가 휴양지에 가져갈 음반을 딱 한 장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메조 소프라노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가 부르는 캉틀루브의 민요집 ‘오베르뉴의 노래’다.
오베르뉴는 프랑스 중부의 산간지역. 휴양지로 유명한 ‘비시’가 이곳의 주도(州都)다. 이곳 출신의 작곡가 캉틀루브는 어릴 때부터 들어온 민요들에 선명한 관현악 반주를 입혔다. 강물을 건너오라고 꾀는 연인의 노래, 목동에게 버림받고 눈물 흘리는 처녀의 탄식… 우리나라의 태평소를 연상시키는 오보에의 발랄한 연주도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