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년’을 꼭 ‘분단 60년’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나는 ‘분단’이란 말에는 감격할 수 없다. ‘통일지상주의자’나 (만일 그런 게 있다면) ‘분단고수주의자’나 분단, 분단 할 때 오직 ‘국토 분단’만을 강조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그게 고정관념이 되고 만다.
그러나 광복과 더불어 갈라진 것은 국토만이 아니다. 국토 분단 못지않게 민족이 ‘분리’됐고 정치 이념도 ‘분열’됐다. 갈라진 것은 땅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갈라졌고 또 사람들이 이고 사는 하늘도 갈라진 것이다.
2000년 6월 이후 이젠 100만 명을 헤아리는 남쪽 사람들이 북녘의 금강산을 보고 왔다. 그러나 헤어진 혈육을 만나 보기 위해 남으로 넘어오고 북으로 넘어간 사람의 수는 지난 5년 동안 불과 기천 명대에 머물러 있다. 금강산으로 백두산으로 분단된 국토는 100만 명대의 남한 사람들이 월북해서 ‘관광’을 했다. 하지만 철조망으로 ‘구획’된 북의 ‘조계(租界)’ 안을 관광하면서 남북의 분리된 민족이 얼마나 많이 만나고,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지…. 갈라진 땅은 쉽게 찾아가도, 갈라진 사람은 뜻대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햇볕정책과 6·15정신이 구가하는 남북관계의 현주소다.
60년을 헤어져 살다 보니 같은 모국어의 말뜻도 갈라지고 달라지고 있다. 오늘날 남에서 쓰는 말 가운데에는 북에서 쓰는 같은 겨레말보다도 차라리 영어나 일본어의 말뜻이 더욱 가까운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등이 그런 것들이다. 60년을 하루같이 부자간에 권력을 세습해서 지배하는 나라를 북에서는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남쪽 개념으로는 그건 세습 독재국가요, 민주주의도 아니고 인민의 공화국도 아니다.
말은 같은 ‘기자’라고 해도 남과 북 사이에 그 위상이나 기능은 판이하다. 남에서는 누구나 작심해서 열심히 공부해 신문사 시험에 붙으면 그 다음날로 신문기자가 된다. 그러나 북에서는 아무나 기자가 되는 게 아니다. 모든 기자는 예외 없이 당이 선발해서 당이 길러낸 당의 ‘cadre(간부)’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언론의 역할도 남과 북은 다르고 심지어 뉴스의 기능도 다르다. 언론인은 단순히 보도 논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북에서는 ‘당을 위한 선전선동자요, 당 사업의 조직자’다. 뉴스는 한낱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에 의한 선전’을 위해서 있고, 오직 당과 수령을 위해 도움이 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소비에트 체제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에겐 이건 상식이요, 진부한 진리다. 그러나 그걸 모르고 남쪽의 신문사 사장들이 몇 해 전 평양에 초대돼 가서는 환대를 받더니 북의 신문사와 자매결연을 하겠다고 나서는 등 ‘소극(笑劇)’을 벌인 일도 있었다.
올여름에는 남쪽의 작가들이 대거 월북해서 북쪽의 ‘동료’들과 함께 민족작가대회를 개최했다. ‘산문(散文)작가’라는 애매한 신분으로 이 대회를 취재하고 돌아온 동아일보 권기태 기자는 북쪽에선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쪽 참가자 명단도 밝히지 않아 북의 문학계는 안개에 싸여 있는 듯 답답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심지어 북한에서는 문인들 이름과 직함도 비밀이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이었다니 어이가 없다. 기본적으로는 문학, 문학인의 기능에 대한 남과 북의 근본적인 개념이 다르다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북에선 작가란 ‘자유(직업)인’이 아니다. 이 사실의 인식이 중요하다. 1905년, 지금부터 100년 전에 이미 레닌이 ‘당 조직과 당 문학’에서 강조한 것처럼 ‘문필가는 반드시 당 조직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같은 작가라 하더라도 남에서 올라간 작가는 북의 ‘동료’가 어떤 종류의 작가인지를 알고 가면 좋을 것이다. 그건 이따금 심심파적으로 나오는 남북 국회의원회담 개최 제의도 마찬가지다. ‘소비에트(평의회)’ 민주주의란 바로 ‘의회’ 민주주의의 부정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남북 국회회담이란 ‘의회의 대표자’와 ‘소비에트의 대표자’ 회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일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최정호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