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6일로 60주년. 5일 일본 히로시마(廣島) 시내 ‘평화기념공원’과 원폭 투하 당시의 앙상한 철골이 그대로 보존된 ‘원폭 돔’ 주변은 참배객과 반전반핵 단체 회원, 취재진으로 크게 붐볐다. 행사 내용은 대개 일제 침략에 대한 반성은 외면한 채 ‘가해자’ 미국만 비판하는 것이어서 일본 사회 전반의 국수주의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했다.》
▽추모장이 반미 선전장으로=5일 오전 10시 공원 내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앞에서는 재일교포와 학생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36회 위령제가 열렸다.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평화를 간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일본 여고생 걸스카우트 회원 20여 명이 눈길을 끌었다.
처음 이곳을 찾았다는 고교 2년생 니시무라 유코(西村裕子·16) 양은 “역사 시간에 배운 적이 없어 한국인 원폭희생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서 “강제연행에 대해서도 공부할 생각이며 한국인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다짐했다.
공원 여기저기에서는 반전반핵을 표방하는 민간단체 회원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죄 없는 어린이, 부녀자, 노인을 학살한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는 운동에 동참해 주십시오.”
회원들의 호소에 지방에서 대형버스로 참배하러 온 일본인들이 다투어 서명했다.
버스 정류장 등에 세워진 시민단체의 선전차량에서는 원폭 금지를 요구하는 집회가 6일 열린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반미 주장이 거듭됐다.
차 안에 있던 ‘다카노(高野)’라는 청년 회원은 “원폭을 투하하지 않아도 전쟁은 끝났을 텐데 미국 단독으로 일본을 침략, 점령하기 위해 잔혹한 학살을 했다”며 미국의 ‘비인도적 처사’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에게 일제 전쟁범죄에 대한 의견을 묻자 “솔직히 잘 모르겠다”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공원 내에서는 원폭 투하 직후의 검게 그을린 시체 사진 등 당시의 참상을 전하는 전시회도 열렸다. 대부분 일본의 원폭 피해만 강조했을 뿐 일제의 아시아 침략 전쟁에 따른 참상은 외면했다.
히로시마 시내의 원폭투하 60주년 기념사진전에서 만난 50대 여성 안내자는 “아시아 각국민이 힘을 모아 반핵 운동을 벌여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아시아 침략의 참상에 관한 자료가 한 건도 없는 이유를 묻자 “이번 전시회는 어디까지나 원폭 투하를 기념하는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잊혀져 가는 교훈=평화기념공원에는 1952년 세워진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지난달 26일 국수주의단체의 한 회원(27)이 비문을 훼손해 경찰에 구속됐다. ‘편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니’란 비문 중 ‘잘못’이란 부위를 망치로 뭉개버린 것. 일본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왜 일본인 스스로 이런 말을 썼느냐는 것이 범인이 경찰에서 밝힌 훼손 이유였다.
비문은 6일 기념행사를 앞두고 원래대로 복원된 상태였다. 비석 내부 석실에는 원폭 희생자 23만7062명(5월 말 현재·원폭 투하 직후 숨진 12만여 명과 후유증으로 숨진 사람 포함)의 명부가 들어 있다.
가족과 함께 위령비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는 한 시민은 소감을 묻자 익명을 요구하며 반미 선전장으로 변한 공원 주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는 “과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일제 침략 전쟁의 가해 사실을 부인하려는 최근의 일본사회의 풍조를 우려했다.
아사히신문이 최근 전국의 피폭자 1만3000여 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62%가 ‘미국은 사죄해야 한다’고 답했다. 또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미국과 일본 쌍방에 있다’는 의견이 50%를 넘었다.
5일 평화기념공원 내 풍경은 한국 중국 등 일제 침략에 피해를 본 나라 국민으로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본인의 상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히로시마=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