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술을 심오하다 했는가. 누가 예술을 고상하다 했는가.
20세기 후반 미국 예술계에 등장한 앤디 워홀(1928∼1987). 그는 미국 화단의 ‘이단아’였다. 그의 작품은 도무지 예술의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우선 소재부터가 파격적이었다. 그의 작품은 콜라병과 통조림깡통을 소재로 삼았으며 메릴린 먼로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이미지를 포착했다. 그에게 소재 선택의 최대 기준은 대중과의 친숙성이었다.
작업 방식도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는 일종의 판화 기법인 실크스크린 방식을 이용해 수백 점씩 작품을 찍어냈다. 작가의 손이 아닌 기계의 재생산을 통해 창조된 그의 작품은 예술의 엄숙주의를 거부했다.
그에게 작업실은 창작의 고행이 이뤄지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불렀다.
워홀은 1950년대 미국사회의 변화상을 일찍 그리고 정확하게 간파한 예술가였다. 공황과 전쟁에서 벗어난 미국인들은 경제호황에 들떠 있었고 소비가 미덕이 되면서 광고의 마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대량소비와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시대에 워홀은 ‘팝 아트(Pop Art)’ 운동을 주도했다.
미디어·광고·만화·상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하는 팝 아트는 1950년대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미국으로 건너와 꽃을 피웠다.
워홀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1928년 8월 6일 피츠버그의 가난한 체코슬로바키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워홀은 뉴욕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한 후 본격적으로 팝 아트에 뛰어들었다. 동성연애자이자 마약상용자였던 그는 1968년 한 여성의 총에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도 했다.
1960, 70년대 워홀의 ‘공장’은 유명인들의 쉼터였다.
그가 캔버스에 옮긴 대중스타들처럼 그 역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대중의 우상으로 살아갔다. 그는 스타에 매혹된 현대사회를 바라보며 “누구나 15분 동안 유명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상업적’ ‘통속적’이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술도 하나의 재화’라는 사실을 가장 도발적으로 보여 준 예술가이기도 했다.
워홀은 종종 불만스럽게 물었다. “왜 예술가를 특별하게 보느냐.”
그에게 예술가는 ‘단지 하나의 직업(just another job)’일 뿐이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