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그건 단순한 과학 이론이 아니었다. 수백 년간 서양인들을 지배했던 종교와 세계관을 뒤엎는 혁명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도 마찬가지다. ‘존재를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개념은 뉴턴 이후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오죽하면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처럼 과학은 본래 철학이자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열매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과학을 단지 생산력과 경제력을 높이는 도구로만 생각한다. 과학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과학자들조차 인접 분야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과학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도 눈을 감는다.
근대 과학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선진국의 기술을 배워 경제 개발을 하기 바빴던 터라 과학의 다양한 함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최근 생명과학의 발전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근본적인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생명을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인간과 다른 생명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애완견 복제에 성공했다. 한국의 생명공학이 이룬 성과에 감탄이 쏟아졌다. 황 교수는 이 기술을 질병 연구에만 사용하고 애완동물 복제에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애완견 복제 기술을 바이오 벤처 회사에 전수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예측이 벌써부터 나온다. 바이오산업으로 과학기술 강국을 앞당기자는 기대 섞인 의견도 많다. 이 민감한 기술을 ‘생산의 도구’로만 보는 시각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애완동물을 복제해 주는 회사가 생겼고 동물보호 단체들은 동물 복제 반대 모임을 결성하는 등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동물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자원 낭비가 초래할 재난을 우려해 채식주의자가 늘고, 가축을 키울 때도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며, 동물원에서도 철책을 없애는 추세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동물 복제의 의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토론이 없다. 동물이 대량 복제됐을 때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머지않아 인간 복제도 가능해지는 게 아닌지, 신은 인간에게 물리적 생물학적 변화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무조건 과학기술의 발전을 막는 것은 어리석다. 생명과학이 고도로 발전한 미래에는 생명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이 가져올 변화, 과학적 성과가 갖는 의미에 대한 논의는 좀 더 활발해져야 한다. 과학으로 달라지는 세상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철학이 있는 과학’을 할 때가 됐다.
신연수 경제부 차장 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