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이 두 가지가 한국 기업인에게 절실한 시점이다. 왜 그럴까.
상장기업들은 47조 원의 현금을 쌓아 놓고 있다. 이 가운데 상당 금액은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대기시켜 놓은 돈이다. 외환위기 이전엔 기업들은 대체로 빚을 내서라도 사업을 확장하면 이자를 물고도 뭉칫돈을 벌었다. 그러나 요즘엔 은행에서 “제발 돈을 빌려 가라”고 하소연해도 외면한다. 손에 쥔 돈조차 굴릴 데가 마땅찮기에….
오죽하면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기업들은 정부 규제 탓만 하지 말고 새로운 수익모델과 블루오션(수익성 큰 미개척 시장)을 찾아라”고 기업을 다그쳤을까. 물론 수도권 공장 신설 규제, 출자총액제한 등 투자를 가로막는 정부 규제가 수두룩한 게 사실이다. 또 정치권 난기류가 거의 늘 재계 쪽으로 불어 와 투자심리를 얼어붙게 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외부 악재가 있지만 기업 내부에도 문제가 적잖다.
수익을 올릴 사업 아이템을 찾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다. 기업인의 상상력 부족 탓 아닐까.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으려면 시야가 넓고 사고(思考)가 유연해야 한다.
한국 재계엔 2세, 3세 경영 체제로 접어든 기업들이 많다. 후계 경영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거의 ‘붕어빵’ 경력을 갖추고 있다. 한국 또는 미국의 대학에서 경영·경제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학력, 밑바닥 직장생활은 흉내만 내고 일찌감치 고위 임원으로 승진한 이력, 배우자를 재계 인사 자녀 가운데서 고른 동종(同種) 혼맥….
취업 걱정이 없는 이들이 학부 때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 또는 예술분야를 전공해 인간에 대한 이해 능력을 길렀거나 물리학 화학 수학 등 기초 자연과학을 공부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훨씬 넓어지고 거목 기업인으로 자랄 싹을 가질 텐데…. 너무 일찍부터 실용 지식에 매달리다 보니 창의성이 결핍된 게 아닌가.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큰 사업을 벌이기 전엔 논어(論語)를 다시 한번 정독했다고 한다. 삶의 이치를 되새기면 넓디넓은 시장, 요즘 말로 하면 블루오션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월급쟁이’ 최고경영자(CEO)들도 ‘붕어빵’이기는 마찬가지다. 상경계 또는 기술계 전공자들이 대다수이고 취미는 천편일률적으로 골프 등산 독서…. ‘튀는’ CEO가 드물다.
오너 경영인, 전문경영인 할 것 없이 상상력을 키울 경험을 하지 못한 인물들이 즐비하니 무슨 창조적 파괴를 기대할 수 있으랴.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도 이들에게서 모자란 편이다. 온실에서 자란 후계 경영인, 영업현장보다는 기획조정실 같은 데서 보고서 작성으로 잔뼈가 굵어진 전문경영인에게 창업자 수준의 기업가 정신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이긴 하지만….
산업사회 시대엔 대량생산, 원가절감에 공을 들이면 성공할 수 있었다. 사업 아이템을 찾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첨단기술 시대, 지식기반 사회에서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창조 경영’이 필요하다.
파괴적 혁신 이론(disruption theory)의 주창자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저서 ‘성장과 혁신’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경제가 성장한 것은 한국 기업들이 파괴적 혁신전략으로 일본 미국 유럽 기업과의 경쟁에서 성공한 덕분”이라면서 “그러나 이젠 한국 기업들이 중국 인도 기업들에 거꾸로 파괴당할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한국 기업인들이 상상력과 기업가 정신으로 힘을 키운 두 팔을 쭉 뻗어 블루오션에서 거침없이 헤엄쳐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