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대면 알 만한 여당 쪽 고위 공직자는 자식 잘 키운 것으로 그 바닥에서 유명하다. 자녀가 모두 명문대를 나와 요즘 청년층 선망의 대상인 고시 합격까지 했기 때문이다.
정부 여당이 학력 철폐를 추구한다는 건 잠시 제쳐 놓자. 그래도 제쳐 놓을 수 없는 일은 그의 부인이 왜곡된 교육을 바로잡자고 주장하는 학부모단체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수험생이 되자 보통 엄마들처럼 열심히 뒷바라지를 했고, 꼭 엄마 덕은 아니었겠지만 그 집 자녀들은 노무현 대통령 말을 빌리면 ‘좋은 대학 나와 크게 성공하는’ 집단의 당당한 후보가 됐다.
자식 키우는 사람은 이런 소리 들으면 화난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까지 도청을 자행했다는 뉴스 뺨치는 대(對)국민 사기극이고, 배신이다. 이 소식을 전해 준 친구는 그 정도에 흥분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이해찬 1세대’ 자식을 둔 집에선 애들이 대학 4학년인 요새도 해찬들 고추장 안 먹는다.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갈 수 있다고 요란하게 떠들더니 그해 수능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기가 다 막혔다. 교육부 장관 말 믿고 아이 과외 안 시킨 집에선 재수시키면서 엄청 후회했다더라.” 그러곤 덧붙였다. “사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긴 법에도 안 걸리는 이런 사소한 문제를 두고 사기당했다고 펄펄 뛰면 뛰는 사람만 제명대로 살기 어렵다. 높은 자리와 전문가의 힘에 꼼짝 못하는 권위의 설득 원칙에 넘어간 쪽만 바보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정치인의 공언(公言)에 속은 ‘정치적 사기의 국민적 피해’로 따지면 면역이 생길 때도 지났다. “안심하고 통화하라”던 김대중 정부 때 국가정보원의 도청 역시 몸통은 없고 깃털만 날린 사건으로 잊혀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미국의 ‘사기 문화’란 책은 “남들도 다 한다는 통념 때문에 정치인부터 학생들까지 죄의식 없이 사기 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했다. 이런 말이 사기가 아니라면, 바뀐 환경에 맞춰 살 필요가 있다. ‘나부터 법대로’가 제일 바람직하지만 그랬다간 또 사기당한다. 집단이 작을 때는 사기꾼이 있어도 조금씩 당해 주며 협조자들끼리 대세를 이뤄도, 수백 명 단위로 집단이 커지면 결국 사기꾼이 득세한다는 게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다.
이때 사기꾼을 벌주는 시스템이 확고하면 상황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법과 제도가 구멍 뚫려 있으면 협조 풍토는 사라진다. 특히 책임지는 사람 없고, 벌을 줬다가도 금방 사면(赦免)해 주는 정치적 사기는 근절하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현실에선 노 대통령 같은 맞대응 전략이 최선의 방법이다. 노 대통령의 경우 처음에는 신뢰를 중시하되 상대가 두 번까지 배신하는 건 봐주고 세 번째 배신에는 자기도 배신하는 ‘tit for 3 tat’ 전략을 쓰는 것 같다고 청와대 참모가 언젠가 소개했다.
안타깝게도 보통사람들은 그만큼 너그럽기도, 대놓고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겉으로는 속는 척하고 돌아서서 실속을 챙기는 게 현명하다. 만일 발각되면 “몰랐다”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떼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다행히 인간에겐 사기꾼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진화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수렵 시절부터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라고 주어진 혜택이다. 뭔가 찜찜하고 어딘가 의심스럽다면 일단 신호라고 보고 어떻게든 피해야 손해 안 본다. ‘경쟁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이 경쟁에 목숨 거는 모습을 봤다면, 그 말 믿고 발 뻗고 자지 말고 죽기 살기로 내 앞길 찾아야 한다. 정치적 사기를 당하고도 ‘미워도 다시 한번’은 끝내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