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그 사이에도 한왕 유방이 소수무(小修武)에서 다시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더 많은 한나라 장졸들이 그리로 찾아들었다. 태위(太尉) 일을 보며 항시 한왕 곁에 붙어있던 노관이 역이기를 비롯한 여러 빈객들을 데리고 한왕에게로 되돌아왔고, 주설(周설)과 육고(陸賈)도 여러 날 하북(河北)을 떠돌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렇게 되자 주발과 역상이 2만이나 되는 군사를 빼가도 한왕의 진채는 활기가 가득했다.
그 무렵 패왕 항우는 성고성에 머물러 군사를 쉬게 하고 있었다. 방금 어렵게 형양성을 우려 빼고 온 뒤라 그런지 장수다운 장수가 별로 남아있지 않은 성고성을 떨어뜨리는 데도 초나라 장졸은 몹시 지치고 힘들어했다. 어쩌면 지난 달포 팽월을 뒤쫓으며 쌓인 피로를 풀 겨를도 없이 형양 성고로 달려온 터라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지간한 패왕도 지쳐 있기는 매한가지라 처음 며칠은 별 생각 없이 장졸들과 함께 쉬었다. 그러나 기력을 되찾자마자 평소의 격정과 자만이 다시 패왕을 몰아대기 시작했다. 무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는 듯한 느낌에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물었다.
“한왕 유방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범증이 죽은 뒤로 간세(奸細)를 풀어 적정(敵情)이나 민심을 살필 줄 아는 책사(策士)는 이미 아무도 패왕의 막하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신이나 진평처럼 다른 주인을 찾아가거나, 계포처럼 입을 다물어 남은 것은 용저나 종리매처럼 치밀한 용간(用奸)과는 거리가 먼 용장(勇將)들뿐이었다. 그들이 낸 척후나 파수로는 밤중에 수레 한 채로 몰래 달아난 한왕의 간 곳을 알 길이 없었다.
“전처럼 관중으로 달아난 듯합니다. 거기서 다시 군사를 긁어모아 관동으로 기어 나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장수들이 추측으로 대강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계포처럼 제법 실상에 가까운 추측을 하는 장수도 있었다.
“관중으로 드는 길목을 지키던 장수들에게서 아무런 기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나라로 간지도 모르겠습니다. 관중으로 가서 조련도 안 된 농투성이들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보다 한신이 그곳에 길러둔 대군을 빼앗는 편이 재기(再起)하는 데 더 손쉽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패왕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다.
“한신은 이미 한 번 주인을 바꾼 자다. 잘 조련된 대군을 거느리고 이미 여러 달 조나라에서 왕 노릇을 해 온 셈인데, 무엇 때문에 패망해 홀로 쫓겨 오는 유방을 받아들이겠느냐? 또 유방은 장돌뱅이로 노름방을 떠돌아 사람됨이 비루하면서도 의심이 많다. 그렇게 함부로 자신의 목숨을 한신에게 맡길 리 없다.”
그러고는 칼자루를 움켜잡으며 자르듯 말했다.
“모두 유방을 뒤쫓아 관중으로 가자. 이번에는 반드시 관중을 둘러엎고 유방을 잡아 죽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뿌리 뽑아야 한다!”
하지만 패왕이 대군을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가려 하자 초나라 장수들은 걱정이 되었다. 근거가 되는 서초 땅을 비워두고 멀리 관중으로 몰려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에 종리매와 용저가 일어나 한목소리로 말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