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 60년 전, 일본 국왕이 침통한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하던 때를. 그러나 조국의 광복은 곧장 분단으로 이어졌고, 분단은 동족 간의 전쟁으로 비화됐다.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를 회상한다. 전장에 쌓인 전우들의 시체, 부상한 전우들의 아우성이 귀에 생생하다. 전장에서 만난 적군의 얼굴은 바로 형제의 얼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 형제가 내 다리를 뭉그러뜨렸다.
아직도 다리가 뭉그러지던 순간이 생생한데, 북에서 온 사람들이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내 전우들의 영혼에 참배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망연해지고 말았다.
환영한다. 국립묘지의 전우들도 그들의 느닷없는 방문 소식을 듣고 심사숙고 끝에 환영하기로 결정했을지 모르겠다. 그들도 지난 60년 동안 계속돼 온 반목과 대결의 세월이 힘들었을 것이다. 60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분노와 증오 속에서 보낸다는 것도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이제는 조금 잊을 만하다고 느끼는 순간,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하러 서울에 온 북측 대표단이 국립묘지를 참배해 전우들의 영혼에 고개를 숙였다.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참배하겠다는 그들의 결정도 결코 쉽진 않았으리라. 그 자체가 이미 화해와 협력을 한 단계 성숙시키고, 지난 전쟁에 대한 회한을 표현한다는 것을 그들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북측 대표단의 국립묘지 참배에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 마음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50년이 넘는 긴 세월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살아온 상이군인의 눈으로 보아도 북측 대표단의 참배를 일단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순리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의 미래를 진정으로 염려한다면 명확한 반대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참배에 시비를 거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 우리 민족은 미래로 나아가야만 한다.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를 올바르게 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해 냈다. 민주화를 통해 우리는 다양성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서로 의견은 다르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관용의 정신을 우리는 학습했다. 이제 우리 민족은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이 시대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부여한 중요한 사명인 것이다.
통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북측 대표단의 국립묘지 참배 같은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통일로 나아가고 있다. 통일은 냉전체제를 해체하고 탈냉전의 평화체제를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의 냉전의식부터 조금씩 허물어뜨려야 한다.
윤 재 철 대한민국상이군경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