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차 북한 핵 위기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뒤에 한반도는 또다시 핵 위기에 휘말려 있다. 그동안 북한의 주장과 억지는 변함이 없는데 이에 대처하는 한미 양국 정부의 입장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고 한미 간 공조 체제에도 불협화음이 커지고 있다.
제4차 6자회담도 전 세계의 각별한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열렸으나 현재 휴회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북한도 평화적 목적의 핵 이용 권리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민감한 시점에 북한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핵 관련 국제협약 위반 사례를 모를 리 없는 장관이 왜 그러한 발언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10여 년 전 1차 핵 위기 때 한미 양국의 입장은 지금과 정반대였다. 미국은 우리에게 북한에 유연할 것을 요청하였고, 우리는 미국에 단호한 입장을 주문했다. 지금 미국 입장이 강경으로 선회한 것은 부시 행정부의 특성 탓도 있겠지만 당시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제네바 합의를 북한이 깨뜨린 탓이다.
북한은 이미 핵 안전조치 불이행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유엔 안보리에 제소된 바 있다. IAEA는 1992년 북한 핵사찰에서 북한의 신고내용과 플루토늄 추출량에 있어 중대한 불일치가 있음을 적발했다. 또 실험용이라는 5MW 원자로에서 IAEA사찰관 입회 없이 일방적으로 연료봉을 인출하였으며 또한 몇 개 핵시설을 은폐하고 있었던 것도 적발했기 때문에 안보리에 제소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으로 응수했다.
북한은 2003년에도 IAEA사찰관 추방, 봉인 제거, 연료봉 인출과 재처리 등의 행위들을 서슴없이 자행했고 다시 한번 자의적인 탈퇴 선언을 한 후 핵무기 보유선언까지 했다. 핵문제에 관한 한 가중처벌을 받아야 할 중범죄 전과자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북한과 이란을 이중잣대로 차별 대우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란은 핵 안전조치상의 의무 이행을 거듭 천명하고 있으며 아직 위반 사례가 적발된 일도 없다. 사실 북한과 같은 안전조치 위반과 NPT 탈퇴는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근본적으로 볼 때 북핵 문제는 미국의 핵 비확산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국민의 생사에 관한 문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NPT 회원국으로서 모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국가만이 가질 수 있는 핵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북한에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 현시점에서는 어불성설이다.
현 단계에서는 한미 간의 굳건한 공조로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폐기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런 다음 북한이 핵 관련 모든 안전조치를 충실히 준수한다는 신뢰가 구축되어 가는 단계에서 일반적 권리로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협의할 수 있을 것이다.
최 동 진 전 경수로기획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