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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유한태]미적 감각 살린 남북단일기 만들자

입력 | 2005-08-18 03:08:00


광복 60주년 기념 8·15민족대축전 남북축구 경기가 태극기의 그림자조차 없고 ‘대∼한민국’의 함성도 숨죽인 채 한반도 깃발만 물결치는 ‘볼거리’로 끝났다.

이번 행사는 남북한 공동행사 때마다 사용하고 있는 이른바 ‘한반도기’에 대한 시각적 문화적 자각을 뒤늦게나마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한반도 지형을 근거로 흰색 바탕에 옅은 하늘색으로 표시한, 임시 급조된 인상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색채도 선명하고 인상이 강렬한 세계 대부분 나라들의 상징 깃발 대열에서 뒤처져, 디자인 문화적 관점에서 남북한의 정체성을 인상 깊게 심어주기엔 역부족이다. 남북을 포괄한 한민족의 미의식과 디자인 문화가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느냐는 식으로 국제사회에 비칠 우려가 다분하다. 한반도 브랜드의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남북한의 상징이 단일화된 ‘콘텐츠 업그레이드’가 시급하다.

차제에 태극기와 인공기가 절묘하게 조화되거나, 제3의 시각적 알맹이를 담은 새로운 상징에 대한 남북간의 논의와 합의가 절실하다고 하겠다.

남북간 화해와 동질성을 가상의 심벌로 시각화함에 있어, 태극기와 인공기에 다 같이 적·청·백색의 3가지 색이 사용된 점은(태극기의 4괘 부분 검은색을 제외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즉, 색채심리학적으로도 태극기와 인공기는 형태적인 ‘합일’ ‘연합’ ‘통일’을 이루기 좋은 기본조건을 애초부터 갖춘 셈이다. 남북통일에 대비한 심벌의 형태와 관련해 형태 속성과 색채면적의 배분비(比) 등을 실험해 온 필자는 현행 남북 심벌의 제3형태로의 다양한 탈바꿈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기는 하나의 상징, 즉 심벌이다. 무릇 심벌이란 형태와 색채가 단순 명료해야 메시지 전달 효율이 높아져 사람의 뇌리 속에 깊숙이 오래 각인(刻印)되기 마련이다. 특히 국기는 긴 안목의 ‘기호’이기에 임시로 급조될 대상이 아니다. 잘못된 심벌이나 기호는 그릇된 인식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어느 집단이나 개인의 성격도 심벌이나 기호 속에 암시돼 있다는 것이 형태심리학의 입장이다. 매스미디어의 미래를 예언한 마셜 맥루한 씨는 “심벌은 메시지이며 동시에 마사지”라고도 표현했다.

설령 현재의 한반도기를 그대로 쓴다 해도 색채나 한반도 크기가 제멋대로이고 형태도 제각각인 모습을 그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 푸른색이 아주 짙거나 매우 흐린 경우를 비롯해 때로는 제주도가 빠진 경우도 있다. 공동 심벌 하나 제대로 합의 조정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이 하나가 돼 세계 속의 한반도를 인식시키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시각문화가 농축된 수준 높은 단일기에 대한 합의는 남북통일의 시작이다.

어떤 두 가지 사물을 하나로 만들 때 대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하나의 공간 속에 두 가지를 늘어놓는 단순배열법과 이 두 가지를 서로 융화시켜 제3의 모습으로 승화시키는 고차원적 접근법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사자와 호랑이를 단순히 한 우리 속에 넣은 것과 이 둘이 융화된 ‘라이거’는 개념상 ‘연합’과 ‘통일’의 차이쯤 될 것이다. 현재의 ‘단일기’는 ‘남북연립기’나 ‘남북연합기’이지 ‘남북통일기’는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몸이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듯이 깃발은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한반도기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를 되새겨봐야 할 때다. ‘기(氣)’와 ‘얼’이 빠져 있는 무색무취의 한반도기를 언제까지 공허하게 흔들어댈 것인가. 혹시라도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처럼 논의 자체가 부담스럽거나 남북간 합의 도출이 험난할 것 같아 일부러 기피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뒷골목의 분식점조차도 이미지통합(CI) 작업을 하는 판에 국가 단위의 합의된 심벌이 없어서야 어찌 말이 되겠는가.

유한태 숙명여대 교수 형태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