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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이상철]정보기관은 정권 아닌 국민의 파수꾼

입력 | 2005-08-18 03:08:00


국가정보원 도청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도청 즉, ‘몰래 듣기’의 역사는 인간의 문명과 함께 발전해 왔다. 전쟁에서는 첩보를 통한 정보 활용이 승패를 좌우한다.

현대판 도청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각국이 정보기관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영국은 국내정보국(MI5), 옛 소련은 레닌 시절에 군정보총국(GRU)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앙정보국(CIA)과 국방정보국(DIA), 국가안보국(NSA) 등을 설립했다.

한국도 1961년 중앙정보부로 출범한 조직이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현 국가정보원에 이르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도청을 뜻하는 영어는 와이어태핑(wiretapping) 등이 있었지만 전자정보도청 시대로 들어가면서 에셜론(echelon)이 대명사가 되었다.

에셜론은 원래 공군의 편대 유형을 의미하나, 정보 세계에서는 2차대전 중에 결속된 미국과 영국의 첩보 동맹을 의미한다. 에셜론은 냉전 기간에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정보 감시 활동을 주로 했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부터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정보기관들이 협정을 맺고 120개가 넘는 위성을 통해 세계 통신 정보를 도청해 왔다.

에셜론은 1998년 한 영국기자가 통신 감청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그 실체가 밝혀졌다. 영국 정보기관(MI5, MI6)은 소련의 우랄산맥 서쪽부터 유럽의 통신 정보를 도청하고, 호주 정보기관(ASIS)은 인도차이나반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와 중국 남부 지역을 담당했다. 뉴질랜드 정보기관(NZSIS)은 태평양 서부 지역을 담당하고, 캐나다 정보기관(CSE)은 소련 우랄산맥 동쪽의 지역을 담당했다.

미국 NSA는 중남미와 아시아, 중국의 북부 지역을 담당하며 하루 최대 30억 개의 개인 통신정보를 도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에셜론의 본부는 연간 예산 36억 달러를 들여 세계적으로 3만8000명의 인원을 배치해 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정보기관들의 주 업무는 테러 방지다. 그러나 자국 산업과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기업 간의 거대 입찰 및 계약에 관한 정보를 자국 기업에 제공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어느 누구도 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유용한 정보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안보를 책임진 정보기관은 이러한 상대를 대상으로 그들의 본심을 파악해야 한다. 지금 각국의 정보기관들도 도·감청을 통해 자국 산업 정보와 기술 정보를 보호하며 경제 정보에 대한 전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국정원은 국민 앞에 도청한 사실을 시인했다.

엄밀히 말하면 ‘정치적 도청’ ‘정권을 위한 도청’을 했음을 자백한 것이다. 국가 정보기관이 국민의 안전과 산업·기술 정보를 보호해야 하는 본연의 임무는 뒤로 하고 정권의 ‘국내 정치’를 위해 도청한 것은 문제다. 이는 최고 권력자가 정보기관을 정권 유지 기관으로 전락시켰고, 정보기관은 이에 발맞춰 권력자 개인에 대한 충성에 앞장 선 결과물이다. 국정원은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국정원은 더 이상 정권과의 정보 밀회가 없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입증함으로써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국제적 정보 전쟁의 시대에 국민의 안전과 국가 경제를 위한 정보 보호에 매진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도덕적 정당성을 얻어나가야 한다.

세계 각국의 정보 전쟁이 치열한 지금 우리 정보기관을 허물어버리는 것은 국가 장래를 위해서는 염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청을 한 국정원의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질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정보기관으로 발전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격려를 해 주어야 한다.

이상철 성균관대 교수 커뮤니케이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