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더라도 그를 먼저 묻고 떠나겠노라. 영원한 하늘이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가 차지한 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넓은 대륙을 장악했던 ‘광명의 신’ 칭기즈칸. 그는 6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1227년 8월 18일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정복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건 차라리 광기에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볼가 강에 걸친 그의 유라시아 대륙은 해가 뜨는 동시에 질 만큼 광활했지만 탕구트(서하)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약해진 몸을 이끌고 최후의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탕구트족의 최후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 대신 그의 죽음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사흘 후 몽골 정예부대의 저돌적 공격에 탕구트족은 항복했지만 그의 유언에 따라 왕을 비롯한 전 주민은 살해됐다.
칭기즈칸의 시체는 수레에 실려 고향으로 호송됐고 비밀이 새나가게 하지 않기 위해 도중에 만나는 생명체는 모두 죽여야 했다. 몽골 초원 어딘가에 봉분도 없이 비밀리에 묻혔을 그의 영묘 조성에는 1000여 명의 인부가 동원됐지만 이들 역시 모두 살해됐다.
수만 마리의 말이 동원돼 지면을 평평하게 하는 작업이 진행됐고 원사(元史)에는 40여 명의 아름다운 처녀를 선발해 갖은 보석으로 곱게 단장한 뒤 말과 함께 제물로 바쳐졌다는 기록도 보인다.
제사 지낼 때를 대비해 어미 낙타가 보는 앞에서 새끼 낙타를 잔혹하게 도살한 다음 낙타의 모성 본능을 이용해 밀장(密葬)한 곳을 다시 찾았다.
고양이 눈에 흰머리조차 없었으며 노년에도 대단한 성욕을 자랑했던 칭기즈칸은 500여 명의 처첩을 뒀다. 그 후예가 현재 전 세계에 걸쳐 1700만 명이나 된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여기까지는 몽골에 글이 없어 자신의 역사를 손수 남기지 못했던 칭기즈칸에 대한 적대국의 기록. 칭기즈칸이 흑사병보다 무서운 몽골의 잔인한 살육자로 서술된 이유다.
하지만 칭기즈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달라지고 있다. 1995년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000년간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그를 꼽았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칸이 됐다.”
임종 순간까지 전쟁터를 떠나지 못했던 칭기즈칸. 이런 그에게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영토 확장이 아닌 자신에 대한 정복이었으니….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