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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동트기 전

입력 | 2005-08-19 03:05:00

그림 박순철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정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면서도 한왕이 시침을 떼고 물었다. 정충이 별로 흔들리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소(蕭) 승상이 군사와 곡식을 모아주고 장수들이 모두 돌아오자, 그때도 대왕께서는 함곡관을 나가 항왕과 싸우기를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원생(袁生)이 말려 무관(武關)으로 나가시게 되고, 완(宛)과 섭(葉) 사이에서 새로운 전단을 열어 전국(戰局)을 주도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 이렇게 서둘러 항왕의 날카로운 칼끝으로 다가가시는 것입니까?”

“지금 서둘러 항왕과 싸우지 않으면 무얼 하란 말이냐? 또 달아나기라도 하라는 것이냐?”

“우리 군사들이 낙양과 공현에서 초나라 군사들을 막아내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초군의 기세는 사납기 짝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용맹한 항왕과 그 장수들을 당해낼 만한 장수들도 없으면서 서둘러 부딪쳐 가는 것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전처럼 누벽(壘壁)을 높이 쌓고 참호를 깊게 파 굳게 지킴만 못합니다.”

그 말에 문득 싸움터를 사납게 휩쓸어 오는 패왕 항우의 무서운 얼굴을 떠올린 한왕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전에 원생의 말을 따랐어도 결국은 홀로 성고에서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음을 다시 떠올리고는 뒤틀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과인더러 다시 자라 모가지를 하고 항왕을 피해 다니기만 하라는 말이냐?”

정충이 갑자기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대답했다.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천하 여기저기 불을 질러 항왕으로 하여금 잠시도 쉴 틈 없이 팽이처럼 돌며 그 불을 끄게 해야 합니다.”

“또 팽월이나 경포로 항왕의 화를 돋워 끌고 다니게 하라는 말이로구나. 그러나 그 불로는 항왕의 수염 한 올 그을지 못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항왕은 그들이 지른 심화(心火)로 나날이 그을리고 있는 중입니다. 거기다가 조왕으로 세우신 장이도 있고, 제나라로 보내신 상국 한신도 있지 않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왕께서 새로운 불을 지를 수도 있습니다. 태위 노관은 대왕께 가슴이나 배(심복·心腹) 같은 사람이요, 장군 유고는 대왕의 종형(從兄)으로 대왕께는 손발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에게 군사를 나눠주고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다니게 하십시오. 그리 되면 항왕은 더욱 바삐 뛰어다니며 그 불을 꺼야 하니, 그사이 편히 쉬시며 힘을 기르고 계시는 대왕 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한왕도 정충이 뜻하는 바를 모두 알아들었다. 서둘러 군사를 서쪽으로 몰아가는 대신 유고와 노관을 불러 말했다.

“그대들에게 군사 2만과 기마대 몇 백을 줄 터이니 백마진(白馬津)을 건너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라. 가서 팽월을 도와 초나라의 곡식과 재물을 불사르고, 그 백성들이 벌이할 터를 부숴 없애 항왕의 군사들에게 먹을 것을 댈 수 없게 하라. 그러다가 만약 적이 오면 나아가 맞서지 말고 물러나 지키기만 하라. 성벽을 튼튼히 하고 더불어 싸우지 않으면서 팽월과 서로 도우면 지키기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자 패왕이 고단하게 뛰어다니며 꺼야 할 불길이 다시 둘이나 늘게 되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