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TV가 안방을 점령하고 있다. 전국 가구의 73%가 케이블TV에 가입해 있다. 그 수가 1300만 가구에 이른다. 지상파TV도 케이블을 통해 본다. 안테나를 지붕 위에 세워 TV를 시청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집에서 케이블TV를 시청하다 보면 지역케이블 회사(SO·System Operator)가 보내주는 채널이 자주 바뀌어 황당하다. 낚시방송을 즐겨 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낚시방송이 안 나오고 엉뚱한 채널로 바뀌어 있는 식이다.
현재 지역케이블 회사가 가입자에게 보내줄 수 있는 채널은 용량의 한계 때문에 70여 개로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 음악 스포츠 다큐 게임 등 각종 유선채널은 이보다 훨씬 많은 170개가 운영되고 있다. 지역케이블 회사는 이들을 마음대로 선택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채널사업자(PP·Program Provider)로 불리는 각종 유선채널이 아무리 좋은 방송을 하고 있어도 지역케이블 회사가 틀어 주지 않으면 시청자는 그런 채널이 있는지도 모른다. 시청자의 선택권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방송계를 지배해 온 지상파TV도 케이블 가입자에겐 70개 채널 중 하나다. 만약 지역케이블 회사가 작심하고 지상파TV를 틀어 주지 않는다면 가입자는 따로 안테나를 세워 지상파를 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게다가 상당수 지역에서 한 케이블 회사가 관할 구역을 독점하고 있다. 시청자는 보내 주는 대로 TV를 봐야 하며 공급자를 변경할 수도 없는 처지다. 이래서는 시청자가 무시되고 방송이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어렵다.
케이블TV 초창기에 적자가 계속되자 방송위원회는 ‘규모의 경제’를 유도한다며 한 회사가 여러 곳의 지역케이블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예를 들어 CJ케이블넷은 경남지역의 4개 케이블 회사 가운데 3곳을 거느리고 있고 서울과 부산에도 케이블 회사를 갖고 있다. 어느 사업자가 부산의 지역케이블 회사를 몽땅 인수한다면 부산 시민 모두가 그 사업자가 틀어 주는 방송만 볼 수밖에 없다.
이런 하드웨어의 독점을 바탕으로 케이블TV는 차츰 소프트웨어의 강세까지 손안에 넣고 있다. 2000년 지상파TV의 시청점유율은 91.6%를 차지해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으나 지난해에는 71.2%로 내려앉았다. 반면에 케이블 등 비지상파 채널의 점유율은 2000년 1.5%에서 지난해 28.8%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케이블TV에는 폭력물 오락물이 넘쳐난다. 적은 제작비용으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선정주의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풍토는 가뜩이나 조급해진 공영방송을 더더욱 시청률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내보낸 KBS와 알몸을 노출하고 영화 장면을 실제 장면이라고 내놓았던 MBC의 최근 행태는 매체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다매체 다채널 체제가 영상시대의 문을 활짝 열고 있지만 모든 방송이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상업주의, 선정주의로 흐르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지금은 케이블TV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여건이다. 이들의 횡포를 막고 시청자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대책이 절실하다.
현 정권이 친여적인 공영방송에 대한 보답과 기대로 중간광고와 가상광고를 허용하면 공영방송의 상업화는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 뻔하다. 이는 공영방송이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공익성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대다수 국민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