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젊은 기획
18일 개봉한 ‘이대로, 죽을 순 없다’(감독 이영은)는 잡탕밥 같은 영화다. 이런저런 잡다한 재료에 고만고만한 향신료를 넣어 버무렸는데 맛이 의외로 좋다. 영화의 소재도 재미있지만, 자신이 뭘 만드는지 정확히 알고 데뷔작에 대한 욕심을 최대한 억누른 감독의 자제력과 연기자들의 호연이 입맛 당기는 요리를 만들어냈다.
마포경찰서 강력3반 이대로(이범수) 형사는 여덟 살 딸 현지(변주연)와 사는 홀아비다. 잠복근무하는 동료 형사가 곤경에 처했는데도 나 몰라라 하며 여성과 밀회를 즐기고 나서는 “현지가 간경화래, 엉엉”하며 딸을 팔아 위기를 모면하는 뺀질이에 뇌물까지 척척 받는 ‘불량’ 형사. 마약사범을 잡으려다 쓰러진 뒤 뇌종양으로 판명돼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자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며 딸을 위해 생명보험을 여러 개 든다. 순직을 해서 보험금 10억 원을 물려줄 계획. 그러나 일하다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아, 이대로의 물불 안 가리는 ‘순직하기 프로젝트’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할리우드 히트작의 장면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상황을 비틀고 뒤집는 패러디가 아니라 장면들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마스크’(1994년)나, ‘총알 탄 사나이’(1988년) 같은 코미디는 물론이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마이클 키턴이 태어날 아이를 위해 자신이 얻은 삶의 노하우를 비디오에 담는다는 ‘마이 라이프’(1993년)도 들어 있다. 할리우드 것뿐만이 아니다. 박신양 최진실 주연의 ‘편지’(1997년) 같은 멜로 영화에다 장진의 그늘까지 살짝 드리워져 있다. 저우싱츠(周星馳)의 ‘소림축구’(2001년)와 ‘쿵푸 허슬’(2004년)에서 빌린 듯한 기법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에서 끄집어낸 요소들이 훅 불면 날아가는 안남미로 만든 비빔밥이 아니라 갖은 소스에 잘 버무려진 차진 밥이 된 것은 전적으로 연출의 힘이다. 어떤 맥락에 어떤 재료를 어느 정도로 익혀 넣어야 할지 이 감독은 잘 알고 있다. 또 이 감독은 코미디에서조차 눈물을 끌어내야 한다는 공식이 자리 잡은 ‘한국 코미디’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감독의 미덕은 언제 “그만”을 외쳐야하는지 타이밍을 절묘하게 아는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분명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이대로와 딸 사이의 사랑을 부각하는 장면을 좀 지루하게 끌고갔다. 그러나 최근 한국 코미디 영화의 ‘처음에 웃기다 나중에 비장하게 울리기’ 법칙은 영리하게 비켜간다. 비장함이 넘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또 극이 신파로 흐르기 직전에 감독은 ‘컷’을 외친다. 그리고 그의 결단은 대부분 맞아떨어진다.
이 영화가 나름대로 ‘쿨’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연기자들도 한몫한다. 이대로의 진면목을 알고 그를 진심으로 돌봐주는 선배 형사 강종태로 나오는 손현주의 연기는 즐겁다. 그는 ‘개새끼’라는 욕을 이대로와 형사 과장(조민기)에게 각각 한번씩 내뱉는데 같은 욕을 전혀 다른 의미와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다. 차 형사 역의 최성국은 전작 ‘색즉시공’(2002년) ‘낭만자객’(2003년)에서 만큼 오버하지 않지만 웃기고, 육반장을 맡은 탤런트 류용진의 발견은 이 영화가 거둔 수확 중 하나다. 이범수는 발군의 연기는 아니지만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는다.
다만 돈은 받을망정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양심은 갖춘 것으로 묘사되는 이대로가, 10억 원을 준다는 말에 혼수상태에 빠진 용의자의 산소마스크를 떼어 내 살인할 결심을 한다는 설정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극의 맥락과도 동떨어진다.
‘몇 년 안에 10억 벌기’가 샐러리맨들의 좌우명처럼 된 한국사회를 풍자라도 하는 듯한 이 영화는 불도장이나 전가복처럼 고급 재료에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든 요리는 아니다. 그러나 한 끼 식사로는 더 바랄 나위 없는, 맛있는 잡탕밥이다. 12세 이상.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