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들의 고단한 삶1860년대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둥지를 튼 고려인들은 1937년 강제 이주로 중앙아시아에 뿔뿔이 흩어져 거친 삶을 살아왔다. 고려인 대부분은 농사와 장사, 막일로 힘든 생계를 꾸리고 있다. 사진 제공 고려인돕기운동본부
《1937년 8월 소련 연해주에 살고 있던 18만 명의 한인은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밀가루로 연명하다 이마저 바닥나자 폭염과 굶주림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 등 1만5000여 명이 열차 칸에서 싸늘히 죽어갔다. 40여 일 만에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에 내던져진 한인들은 극심한 가난과 설움을 견디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러시아 전역에서 소수민족인 카레이스키(고려인)로 살고 있는 한인 동포 55만 명의 삶은 아직 고단하기만 하다. 이들에게 ‘광복 60주년’의 의미는 연령층에 따라 다르게 다가선다. 광활한 동토(凍土)를 유랑하며 언젠가는 빼앗긴 조국에 돌아가리라는 염원으로 거친 삶을 살다 끝내 숨진 선대의 고난을 지켜본 세대는 이제 그리 많지 않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많은 젊은 고려인에겐 한국은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하나인 게 현실이다. 다만 밀려오는 한국 물품과 문화를 접하면서 핏줄 속을 면면히 흐르는 한국인의 정체성(正體性)을 인식하는 젊은이가 조금씩 늘고 있다.》
○ 고려인의 현실
광복 60주년 전날인 14일 러시아 연해주 최대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우수리스크 시내의 한 판자촌.
19세 때 가족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알렉산드리아 남(86) 씨는 “이주 초기 기근으로 5세 이하의 어린이들은 모두 죽었다”며 당시의 참혹상을 전했다.
가족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맨손으로 돌산을 일구고 씨를 뿌렸지만 다수가 혹독한 타향 생활로 일찍이 병사했다. 그는 25년 전 병을 얻어 우수리스크로 돌아왔다. 매달 3000루블(약 10만 원)의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그는 “죽기 전 한국에 가고 싶지만 기약할 수 없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광복절인 15일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의 작은 마을인 파르티잔스크의 한인교회.
예배를 마친 30여 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어로 얘기꽃을 피웠다. 이들은 구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 각국의 차별과 생활고를 피해 연해주로 재이주한 고려인과 그 후손.
현지 관계자는 “이들 중 상당수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 교육과 의료보험은 물론 연금에서도 제외돼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려인 다수는 농사와 장사로 생계를 꾸리는 데다 낮은 학력과 가난의 대물림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어갈 기력마저 쇠진한 실정이다.
○ 고려인 후손들의 희망 찾기
젊은 세대 “우린 달라요”
15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시내 군인극장에서 열린 광복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고려인 학생들. 중고교생에 해당하는 이들은 한국에 대한 높은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희망했다. 우수리스크=윤상호 기자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대 3학년 베치슬라프 박(20) 씨는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배워 또래에 비해 한국어가 유창하다. 그동안 ‘러시아인’으로 살아왔기에 고려인의 불행한 역사는 생경했고 한국은 ‘낯선 나라’였다.
그러나 그는 3년 전 한국을 방문한 뒤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할아버지의 나라’를 집중 탐구하게 됐다. “이젠 어디서든 고려인이고, 한국이 뿌리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어요.”
블라디보스토크대의 한국어학과 1학년 고수진(18) 양은 최근 ‘올드보이’나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한국 영화를 보며 한국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젊은 고려인들이 한국 기업에 적극 진출해 한-러 간 가교역할을 한다면 고려인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기업들의 활발한 진출로 한국어를 배우는 고려인 후손도 점차 늘고 있지만 아직 한국을 잘 모르고 한국어를 배울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젊은 고려인이 더 많다.
이들은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며 “대부분의 젊은 고려인에게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 지원책
소외계층으로 전락한 고려인 사회를 재건하려면 러시아 주류사회에 진출해 권익을 대변할 ‘리더’를 육성하는 것이 핵심과제라고 현지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극동대 산하 한국어대의 남창희(南昌熙) 교수는 “단기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에서 벗어나 고려인 젊은 세대를 러시아 사회의 인재로 키우는 ‘백년대계’에 한국 정부가 눈을 떠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인은 머리가 뛰어나고 교육열도 높지만 힘든 여건 때문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한국 정부와 기업이 이들에게 교환학생의 문호를 넓히고 장학사업을 대폭 확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
교육인적자원부 소속인 이우용(李雨龍) 블라디보스토크 한국교육원장은 “고려인들이 어릴 때부터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정부 차원에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수리스크=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김재영 고려인돕기 연해주본부장▼
“고려인들을 ‘역사의 짐’으로 외면하지 말고 과감한 투자를 통해 한국과 러시아의 미래를 이끌 버팀목으로 키워야 합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5년째 고려인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재영(金在永·35·사진) 고려인돕기운동본부 연해주 본부장은 15일 우수리스크 군인극장에서 열린 광복 60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기자에게 러시아 한인 동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그는 10여 명의 자원봉사자, 현지 직원들과 함께 고려인들에게 한글, 컴퓨터, 영농기술 등을 가르치고 있다.
김 본부장은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갈수록 자신의 뿌리를 망각하는 고려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많은 고려인이 한국어는 물론 자신들의 운명과 직결된 광복절의 의미도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서 방치된 결과죠.”
고려인 문제에 관해선 러시아 현지의 분위기도 잘 감안해야 한다고 그는 당부했다. 현지를 찾은 일부 한국 정치인과 언론이 ‘고려인 자치구’나 ‘발해영토 회복’을 역설하는 바람에 고려인과 자원봉사자들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홍역을 치러야 했다는 것.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에 극도로 민감한 러시아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연해주가 21세기 ‘철의 실크로드’인 시베리아횡단철도(TRS)가 출발하는 전략적 지역인 만큼 한국 정부가 현지 개척에 고려인 후손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연해주의 독립유적지▼
16일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함께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있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를 찾은 전남대 사학과 윤선자 교수가 당시 안 의사의 항일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크라스키노=윤상호 기자
러시아 연해주 곳곳에는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많은 애국지사의 숨결이 배어있다.
연해주 남쪽의 소도시 크라스키노와 포시에트는 무장 항일투쟁의 거점이었다.
크라스키노 인근 추가노브카 마을은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9년 하얼빈(哈爾濱) 의거 직전 11명의 동지와 조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손가락을 자른 곳. 마을 입구에는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세운 ‘안 의사 단지(斷指)동맹 기념비’가 있다. 의병운동의 선봉장인 유인석(柳麟錫)은 1908년 8월 이곳으로 망명해 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지휘했다.
연해주 최대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 독립투쟁의 본거지인 신한촌(新韓村)이 있던 곳. 신한촌은 1911년 제정러시아가 “콜레라가 발생했다”며 도심의 한인촌을 철거한 뒤 외곽에 건설한 조선인 집단거주지로 애국지사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시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선생이 말년을 보낸 집터가 남아 있다.
또 항일의병의 재정적 후원자로 조국독립에 헌신한 최재형(崔在亨)은 1920년 이곳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우수리크스로 끌려가 처형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10여 km 떨어진 우수리스크의 수이푼 강 인근에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기 위해 고종의 특사로 파견됐던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유허비가 서 있다.
크라스키노=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