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그런데 패왕 항우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한왕 유방의 움직임이었다. 패왕은 한왕이 그 부근에 이르기만 하면 갑옷 한 조각 찾아가지 못하도록 온갖 채비를 갖추고 기다렸으나,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도 한군(漢軍)의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패왕이 다시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한왕은 오창(敖倉) 동북 하수(河水=황하)가에 군사를 멈추고 진채를 벌였습니다. 녹각(鹿角)과 목책을 몇 겹으로 두른 데다 누벽(壘壁)을 높이 쌓고 참호를 깊게 파 어지간한 성곽보다는 더 굳고 든든하다고 합니다.”
오래잖아 한왕의 움직임을 알아보러 간 이졸이 돌아와 그렇게 알렸다. 그 말을 듣자 패왕은 다시 울컥 화가 치밀었다. 두어 달 전에 완성(宛城)과 섭성(葉城) 사이를 오락가락 끌려 다니며 한왕과 경포에게 시달리던 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이 흉물스러운 장돌뱅이 놈이 또 지난번과 같은 수작을 부리는구나. 낙양(洛陽) 공현(鞏縣)에 있다는 것들과 연결하여 과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심산인 듯하지만, 이번에는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용저와 종리매를 보내 낙양과 공성의 것들을 제자리에 묶어 놓고 있으니, 과인은 뒤를 걱정하지 않고 유방을 칠 수 있다. 제아무리 굳게 얽은 진채라 해도 과인이 들부순 함곡관(函谷關)에 견줄 수야 있겠느냐? 이번에는 반드시 유방 그놈을 사로잡아 그 어깨에서 머리를 떼어 놓으리라!”
그렇게 소리치고는 곧 장수들을 불러 모아 명을 내렸다.
“지금 곧 군사들에게 한왕 유방을 잡으러 갈 채비를 갖추게 하라. 서두르면 내일 새벽에는 한군의 진채를 들이칠 수 있을 것이다. 단숨에 적진을 짓밟고 모두 하수(河水)에 쓸어 넣어 버리자!”
하지만 패왕은 끝내 한왕을 치러 갈 겨를이 없었다. 불려온 장수들 가운데 있던 군량관(軍糧官)이 반열 밖으로 나와 궁한 소리를 했다.
“대왕. 대군을 움직이려면 무엇보다 군량이 넉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근거지인 서초(西楚)에서는 며칠 전부터 쌀 한 톨 오지 않아 오직 오창의 곡식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오창에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대군은 고스란히 굶게 되었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찌하여 서초에서는 쌀 한 톨 오지 않는단 말이냐?”
패왕이 불길이 뚝뚝 듣는 듯한 눈길로 군량관을 노려보며 물었다. 군량관은 제 죄도 아니면서 기어드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팽월이 다시 양(梁) 땅에 나타나 분탕질을 치는 바람에 벌써 여러 날 전부터 초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이 우리 진중에 제대로 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며칠 노관과 유고란 한나라 장수가 보졸 2만과 기마대 수백 기(騎)를 이끌고 백마진(白馬津)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일껏 날라 온 군량을 불사르고 이제 막 익기 시작한 들판의 곡식마저 짓밟아 버려 가까운 곳에서는 곡식을 구해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패왕으로서는 듣느니 처음이었다. 팽월이 다시 움직였다는 말만해도 분통이 터질 판인데, 다른 한나라 장수들까지 하수를 건너 초나라 땅으로 밀고 들어왔다니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묻는다기보다는 무섭게 꾸짖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