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법·사람·세상’은 지난달 25일 ‘서울고법 피해자-가해자 화해시도’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재판과 판결에 ‘치유와 화해’의 개념을 도입하려는 법원의 첫 ‘실험’을 보도했다.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판사 전수안·田秀安)가 지난달 19일에 예정됐던 강도 살인 피고인 정모(39) 씨의 선고공판을 이달 9일로 연기했다. 정 씨는 올해 2월 A(사망 당시 49세·여) 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피고인.
재판부는 당시 피고인에게는 피해자 유족에게 용서를 빌 기회를, 피해자 유족에게는 마음의 앙금을 털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로 판결 선고를 늦췄다.
전 부장은 피고인과 피해자 유족에게 “재판을 끝내며 처벌만큼 중요한 것이 서로 마음의 상처를 씻는 것”이라고 말했다. 피고인에게는 “용서는 마음으로 비는 것이니 한 번이라도 피해자 유족에게 용서를 빌어 보라”고 권했다.
이 같은 법정에서의 ‘용서와 치유를 위한 실험’은 현대 형법과 형사정책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적용된 것은 처음이었다. ‘처벌과 응보’가 전부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 형벌과 정의의 영역에 ‘치유와 화해’를 도입하려는 시도였다.
9일 오전 10시 서울고법 형사2부 법정. 화해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피고인이나 피고인 가족은 피해자 유족과 연락을 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법정에 나온 피해자 유족의 태도는 여전히 완강했고 정 씨는 항소가 기각돼 1심대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의 첫 실험이 직접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
그러나 이 ‘실험’ 내용이 보도되면서 많은 법조인과 독자가 관심을 표했다. 일부 판사들은 자신의 재판에서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전 부장판사는 9일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실험’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피고인이 지금 가장 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해자 유족이 받고 있는 마음의 고통도 피고인에 대한 원망과 분노 때문일 수 있습니다. 유족이 피고인을 용서하는 것은 스스로 고통을 더는 길이라고 보이며 피고인은 피해자에게서 용서받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장 힘든 용서는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며 용서는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범죄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지만 그로 인한 개인의 고통과 분노와 증오를 계속 확산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용서하고 화해하여 치유되게 할 것인지는 우리의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