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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이병호/국정원, 진정 명예로워지고 싶다면…

입력 | 2005-08-23 03:08:00


1929년 헨리 루이스 스팀슨 미국 국무장관은 당시 국무부에 편성되어 있던 암호 해독 부서를 해체했다. “신사는 남의 편지를 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하지만 이는 국가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적 발상이었다. 이는 곧 냉정한 국제 현실에 직면해 함몰되어 버렸다. 현재 미국은 국가안보국(NSA)이라는 미 정보기관 중 가장 규모가 큰 도청 전문 정보기관을 천문학적인 예산을 써가며 운영하고 있다.

전직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자 역사학자인 오툴은 미 정보기관의 발전사를 기술하면서 책 이름을 ‘명예로운 변절(Honorable treachery)’이라고 지었다. 저자는 변절과 배반, 도청과 같은 음습한 방법이 정보활동의 한 영역임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 기술하면서 이런 행위조차 국가 안위나 국익을 위해 이루어질 경우에는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명예로울 수 있음을 책 이름에다 함축시켰던 것.

하지만 정보활동의 과녁이 국가 안보와 국익에서 벗어나는 순간 명예는 사라지고 변절과 배신의 추악한 모습만 남게 된다. 최근 불거진 도청 파문은 바로 이런 명예가 사라진 정보기관의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정국은 “누가 어떤 불법을 어떻게 저질렀는지”에 대한 수사로 급랭됐다. 역대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 가는 정보 사상 초유의 사태마저 예상되고 있다. 심지어 “국가정보원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도청 사건은 정보기관 전체로 보면 부분적인 현상이다. 정보기관의 다양한 역할과 기능 중 한 부분의 불법적 일탈이 이번 사태의 발생 원인이다. 비록 이 일탈이 국정원 전체의 명예를 훼손하고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킬 정도로 심각한 것이라 하더라도, 국정원의 다른 활동마저 불법적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며 무책임하다.

이번 사태의 진정한 배경은 오랜 기간 관행처럼 굳어져 왔던 정치와 정보기관 간의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 지속적으로 오염되어 왔던 것은 주지의 현실이다. 이런 정치적 오염이 구체적 사례로 나타난 것이 바로 도청이다.

때문에 도청 책임자를 가려 사법처리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매듭지으면 안 된다. 사법적 차원을 뛰어넘는 근원적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

첫째, 이번 기회에 국정원은 원칙적으로 해외 및 대북 정보에 주력해야 하며 국내 활동은 ‘방첩’ 수준에 그쳐야 할 것이다. 장차 우리 안보 현실로 보아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이에 대처하려면 어떤 성격과 능력을 지닌 정보기관이 있어야 하는지, 기초부터 다시 점검하는 성찰 작업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전쟁 관련 대량살상무기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밝혀진 이후 전문가로 구성된 대통령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정보기관 개선 방안을 샅샅이 점검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미 정보기관 개편 작업에 반영되고 있다.

둘째, 국정원 업무의 비밀은 철저히 보장하되 외부적 견제 장치를 만들고 준법감시 등 내부 통제 기능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감시와 견제가 없는 권력조직은 예외 없이 괴물로 변하고 만다.

셋째, 모든 국정원의 업무는 법률과 제도, 매뉴얼에 근거하는 시스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부처 예산 전용 등 낡은 관행을 근절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국정원은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승화해야 한다. 정권 교체 때마다 있어 왔던 ‘개혁의 모양새’가 아니라 진정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이 기회마저 놓치면 국정원은 국민의 신뢰를 영영 잃을 수 있다. 현 사태를 안타까워하는 충직한 국정원 직원들에게 오툴이 말한 ‘진정한 명예’를 되찾아 주는 참된 개혁을 기대해 본다.

이병호 전 국가안전기획부 차장·울산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