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 그가 23일 끝내 잘렸다. 올해 쉰아홉. 내년 독일월드컵 땐 딱 환갑인데 안 됐다. 그는 숙소에서 혼자 지냈다. 세탁물도 혼자 손빨래를 했다. ‘뭐 하러 세탁소에 비싼 돈 들여 맡기느냐’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그의 숙소에는 늘 손수 빤 운동복과 속옷들이 내걸려 있었다.
2002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4강에 올려놓은 거스 히딩크 감독. 본프레레 감독과는 같은 네덜란드 출신인 데다가 나이도 동갑이다. 하지만 스타일은 딴판이었다. 그는 명품을 좋아했다. 옷 넥타이 구두 시계 등 모두가 이탈리아 명품들이었다. 빨랫감은 당연히 세탁소나 호텔에 맡겼다.
본프레레는 소박했다. 보통 티셔츠에 후줄근한 바지 차림을 즐겼다. 넥타이도 잘 매지 않았다. 휴식 때도 축구에 관련된 책밖에 읽지 않았다. 골프도 칠 줄 모르고 영화도 보지 않았다.
히딩크는 능글맞았다. 애인 엘리자베스와 아무 거리낌 없이 데이트를 즐길 정도로 낯이 두꺼웠다. 그는 골프도 즐겼다. 정몽준 축구협회장 등 축구협회 고위층들과 ‘내기 골프’를 하기도 하고 회식에서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를 멋들어지게 부르기도 했다. 그는 일단 훈련장을 벗어나면 선수들과 장난치기를 즐기며 스킨십을 키웠다.
본프레레는 고지식하고 깐깐했다. 연습용 축구공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꼼꼼했다. 히딩크는 영악스러웠다. 어퍼컷 골 세리머니처럼 쇼맨십도 강했다.
인터뷰 스타일도 정반대였다. 본프레레가 ‘매를 버는 스타일’이라면 히딩크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스타일’이었다. 본프레레는 이겼을 땐 얼굴이 환했지만 졌을 땐 딱딱하게 굳어졌다. 히딩크는 인터뷰를 즐겼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없으면 공연히 취재진 앞을 서성였다. 0-5로 졌을 때도 화려한 언어로 위기를 벗어났다.
“창피하지 않다. 좋은 경험이었다. 한국선수들은 투쟁심을 더 길러야 한다.(2001년 5월 30일 컨페더컵에서 프랑스에 0-5로 대패한 뒤)” “반드시 이기겠다는 잔인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때론 사고뭉치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악역을 떠맡지 않는다(2001년 8월 16일 체코에 0-5로 대패한 뒤)”
본프레레는 언론에 둔감했다. 자기 잘못보다는 선수 탓을 하거나 여건 탓을 했다. 가끔 버럭 기자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전술에는 문제가 없었다. 선수들 정신상태가 해이했다.(2004년 10월 월드컵 예선 레바논과 1-1 무승부 뒤) “훈련시간이 이틀밖에 안 되는데 난들 어떻게 하느냐, 월드컵 예선을 통과했는데 도대체 뭐가 잘못인가.(8월 17일 사우디전 0-1 패배 후)”
본프레레는 선수 기용을 해외파 위주의 ‘안전 빵’으로 했다. 모험을 하지 않았다. 선수교체도 소심해서 그런지 너무 미련을 갖다가 타이밍이 늦기 일쑤였다. 색깔도 아리송하고 선수들과 따로 놀았다. 히딩크는 선수들 심리를 손금 보듯 환하게 읽고 이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2002월드컵 때 폴란드와의 첫 경기 하루 전까지도 누가 나갈지 모를 정도로 피 말리는 주전경쟁을 시켰다.
본프레레는 소박하고 인간적이었지만 리더십이 약했다. 히딩크는 얄미울 정도로 영악했지만 조직을 장악해 이끌고 가는 능력이 뛰어났다. 본프레레는 끊임없이 투덜댔다. 히딩크는 팀을 위해선 싸움도 불사했다.
사자 한 마리가 지휘하는 100마리 양의 군대는 양 한 마리가 지휘하는 100마리 사자의 군대보다 더 무섭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