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를 앞둔 선수들의 숨은 표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서울월드컵경기장 라커룸. 21일 K리그 올스타전을 앞두고 백지훈 선수(FC서울·오른쪽)가 축구화 끈을 동여매고 있다.
《축구장의 ‘라커룸(Locker Room)’
말 그대로 그곳은 닫힌 공간이다.
일반인은 물론 취재진도 쉽게 들어설 수 없는 ‘그라운드 전사’만의 공간이다.
그라운드를 사자처럼 누비던 선수가 쪼그려 앉아 있는가 하면,
긴장을 풀려고 주문을 외는 스타 플레이어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경기 결과에 따라서는 질책이나 다짐이 쏟아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라커룸은 늘 닫혀 있다.
프로스포츠의 천국인 미국에서는 메이저리그 등 일부 종목에서 제한된 시간에 취재진의 출입을 허락하고 있다. 하지만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진출한 영국 프리미어 리그 등 축구장의 라커룸은 가장 폐쇄적이고 은밀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21일 K리그 올스타전이 열린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의 라커룸을 취재했다. 한 관계자는 “축구장의 라커룸은 그라운드에서 눈물과 환호를 느끼는 선수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취재진의 출입도 전례가 없다. 다만 올스타전이라는 축제여서 한번 예외를 둔다”며 못을 박았다. 선수들의 땀과 긴장이 뒤범벅된 그곳에 현미경을 갖다 댔다.》
21일 K리그 올스타전을 앞둔 라커룸에서 박진섭 조용형 김두현 백지훈 박주영(왼쪽부터) 등 중부팀 선수들이 차범근 감독의 지시를 듣고 있다. 선수들의 각각 다른 표정이 흥미롭다. 변영욱 기자
○ 라커룸의 기적 그리고 울분
라커룸은 단순히 선수들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비누 거품을 묻힌 채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공간만은 아니다.
라커룸은 때로 기적을 만들어낸다. 짧은 하프 타임. 전반전 내내 무기력했던 팀이 하프 타임을 계기로 무서운 팀으로 변하기도 한다. 2003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곳을 통해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며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뤄냈다. ‘라커룸의 기적’이다.
하지만 승부에 진 팀의 라커룸만큼 우울한 곳도 없다. 익숙한 공간이긴 해도 선수들에게는 각자 기억하는 ‘최악의 라커룸’이 있다.
17일 사우디 전에서 퇴장당한 김동진의 말. “그날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후반 25분 퇴장당해 저 때문에 팀이 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백전노장에게도 예외는 없다.
“내 축구 인생에서 최악의 라커룸은 2003년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뒤였습니다. 팬들의 충격도 작지 않았겠지만 그날 선수들의 충격은 상상 이상입니다. 축구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계속됩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난번 사우디와의 경기에서 진 뒤 후배들에게 ‘나쁜 기억은 빨리 잊자’고 했습니다.”(이운재)
○ PM 2:40(라커룸)
아직 라커룸은 텅 비어 있다. 경비 요원을 빼면 아무도 없다. 사물함 앞에는 출전 선수들의 유니폼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맨 왼쪽에 등번호 10번이 새겨져 있는 박주영(FC서울)의 붉은 유니폼이 보인다. 차례로 백지훈 김두현 이운재 김동진 등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라커룸의 공식 명칭은 ‘팀 드레싱 룸’이다. 마사지룸에 이어 선수들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개인 사물을 보관하는 20여 개의 열린 캐비닛이 있다. 라커룸과 라커룸 사이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다.
갑자기 중부팀이 이용하는 라커룸이 시끄러워졌다. 정해성(부천 SK 감독) 박항서(경남 FC 감독) 차범근(수원 삼성 감독) 조병득 이임생(이상 수원 삼성 코치) 등 ‘홈 커밍 매치’에 출전하는 OB 스타들이 들어섰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호령한 ‘차붐’ 차 감독에게 라커룸은 어떤 공간이었을까?
“때때로 무섭고 힘들고 괴로웠죠. 그곳에서 듣는 선배, 선생님(감독)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때렸습니다. 지도자가 된 뒤로도 피를 말리는 승부를 둘러싸고 머리싸움을 치열하게 벌이는 공간입니다.”
선후배가 만나는 지금의 여유로운 분위기는 상상할 수 없다.
차 감독은 이어 “‘진짜 축구’는 현역 올스타 경기를 봐야지.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고 보여주는 거야. 우리는 잘하면 안돼. 실수를 해야 팬들이 재미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장수(FC서울) 감독이 OB 올스타 감독인 차경복 감독에게 교체를 희망했다는 말이 들렸다. 이유를 묻자 이 감독은 “손들면 교체해 주기로 철석같이 약속했다. 내가 손들고 나와야 우리 팀이 이긴다”고 말했다.
“우리는 오늘 ‘양차(兩車)’로 하죠.”
두 차 감독이 중부 팀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누군가 농담을 던졌다.
○ PM 3:00(라커룸 밖)
라커룸 옆에는 10평 크기의 워밍업룸이 있다. ‘전반만 뛰겠다’ ‘빨리 교체해 달라’ 등 엄살이 섞인 주문은 많았지만 워밍업룸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나, 오늘 K리그 데뷔전이래. 4 대 3 정도로 이겨야지.”(차 감독)
‘몸 풀고 나면 지쳐서 본게임을 못 뛴다’며 손사래를 치던 조병득 코치도 골키퍼 훈련을 하느라 금세 유니폼이 젖어버렸다.
같은 시간 라커룸 옆의 올스타전 기수단 대기실.
이날 기수로 라커룸 옆에 있던 박평서(12) 군은 “스타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 너무 좋다. 데이비드 베컴이나 박주영 형처럼 축구를 잘하고 싶다”고 말했다.
40분 뒤 심판 선수단 전용 출입구.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입장하기 직전 모이는 공간이다. 상대 남부팀에 김주성 홍명보 황선홍 등 ‘젊은 OB’들이 보인다.
“누가 이렇게 팀 구성했어. 이거 너무 편파적인 거 아냐. 저쪽은 젊은 애들만 모아놓고 이쪽은 노인네들만 있네.”
중부팀의 불만이다.
2002년 월드컵을 끝으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는 황선홍(전남 드래곤즈 코치)은 “오랜만에 선수로 라커룸을 쓰니 큰 싸움을 앞둔 투사의 느낌이 돌아온다”고 밝혔다.
경기장에는 그를 격려하는 플래카드가 보였다.
‘No. 18 황선홍.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영원히.’
○ PM 4:45(라커룸)
OB 스타들이 경기 중 ‘진땀’을 흘리는 순간, 현역 선수들이 라커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스타들의 축제이기 때문에 긴장이 덜한데도 선수들은 분주했다.
현역 올스타 경기에 중부팀 최고참으로 출전한 김도훈(35)은 충격방지용 쿠션을 만들어 축구화에 깔았다. 그는 “나이 들면 이런 게 필요하다. ‘도가니’가 약해져 무릎에 꼭 테이핑도 해야 된다”며 웃었다.
평소 무표정한 것으로 유명한 박주영은 옆 자리의 백지훈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눴다. 박주영은 몇 차례 인터뷰 요청에 “다른 곳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데 지금 인터뷰를 할 수 없다”면서도 “올스타전이라 그런지 오늘 라커룸 분위기는 축제처럼 편하다”고 말했다. 스타킹을 신으려는 그의 발은 축구로 살아온 스무 살 청춘이 그대로 담겨 있다. 둘째발가락이 조금 긴 그의 발은 성한 발톱이 없는 불안한 발이었다.
5시 45분. 경기 시작 15분 전.
이날 중부팀 감독으로 선임된 차범근 감독이 들어섰다. 2분여의 짧은 미팅을 했다.
“준비 다 됐지. 자, 축구를 하자, 축구를. 개인이 잘하는 축구가 아니라 팀이 살아나는 축구를 하자. 올스타 게임이지만 오늘은 팬들과 우리 자신과의 약속이다. 멋진 경기를 하자.”
○ PM 5:50(라커룸 밖)
OB 올스타 경기는 황선홍과 이상윤(차범근 축구교실 코치)이 페널티킥을 주고받아 1 대 1로 비겼다.
스탠드에서 만난 전상희(17) 양은 “(백)지훈 오빠의 팬인데 라커룸에서 선수들이 혹시 야단맞는지, 또 중간에 문자도 확인하고 휴대전화도 확인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남부팀 이동국은 “장염 때문에 몸무게가 줄었다. 평소처럼 라커룸에서 골을 넣을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고 말했다.
라커룸 안팎에서 선수들을 시시콜콜하게 챙기던 김진훈(32·수원 삼성 주무) 씨는 “라커룸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공간”이라며 “가깝게 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 PM 8:30(라커룸)
현역 올스타전은 남부팀의 3 대 2 승리로 끝났다. 박주영은 신인으로는 세 번째로 MVP로 선정됐다.
경기 끝난 뒤 모인 라커룸에서 누군가 말했다.
“경기 전 오늘 MVP가 선수들에게 휴대전화 하나씩 선물하기로 했는데…. 주영이가 약속 지킬지 모르겠어.(웃음)”
올스타전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선수들은 샤워를 생략한 채 숙소로 이동을 서둘렀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철 지난 해수욕장처럼 썰렁하다.
하지만 라커룸은 다시 새롭게 탄생할 스타와 그라운드에서 사라질 스타를 계속 만날 것이다. 이들이 느낄 감동과 좌절의 순간도 함께 나눌 것이다. 라커룸은 또 기다릴 것이다. 둥근 축구공처럼 알 수 없는 인생의 마술을.
미식 축구를 다룬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에서 디마토(알 파치노) 감독의 말.
“인생과 풋볼이란 게임에선 1인치가 결정한다. 그 1인치는 도처에 널려 있고, 그것들이 모여 승패와 생사를 좌우한다. 어떤 종류의 싸움이건 죽을 각오가 된 자만이 1인치를 찾아낸다. 내 소원은 그 1인치를 찾다 죽는 것이고, 그게 삶이다.”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美, 상업적 필요따라 개방…유럽선 외부인사 출입금지▼
2004년 11월 미국 ABC TV는 미식축구경기 중계를 앞두고 라커룸에서 선정적 장면을 연출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았다. 라커룸을 찾은 거의 알몸 상태의 여성 연예인이 유명 선수와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등을 노출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 ABC는 이튿날 “부적절하고 선정적인 장면을 내보낸 데 대해 깊이 사과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프로스포츠계는 라커룸을 TV나 신문에 제한적으로 개방한다. 팬들의 관심이 몰리는 프로 선수들의 상품성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다. 특히 전용구장의 라커룸은 트레이닝룸, 식당, 비디오룸, 휴게실을 갖추고 있으며 선수들의 클럽하우스와 유사하다.
취재진의 출입이 허용되더라도 제한이 따른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경기 시작 45분 전에 라커룸을 떠나야 한다. 사진기자나 TV카메라기자는 라커룸에 거의 들어갈 수 없다. 선수들의 프라이버시가 사진이나 영상으로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라커룸에서 생긴 일에 대해 함구하는 게 선수들의 불문율이다. 박찬호(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한때 뛰기도 했던 텍사스 레인저스의 클럽하우스 벽에는 큰 글씨로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은 여기에 두고 가라’라고 적혀 있다. 경기 결과에 따라 선수 사이에 욕설이나 주먹다짐이 오갈 때도 있지만 라커룸을 벗어나면 잊으라는 주문이다.
라커룸을 둘러싼 성차별 논쟁도 있었다. 메이저리그의 명문 뉴욕 양키스는 1977년 한 여기자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라커룸 출입을 금지해 고소까지 당했다. 소송에서 진 양키스는 이를 계기로 여기자들에게 라커룸을 개방했다.
미국을 뺀 다른 국가의 프로스포츠계는 라커룸 개방에 대해 부정적이다. 일본 프로야구의 경우 ‘벤치와 라커룸’ 사이의 통로와 그라운드에서만 취재를 허용하고 있다.
특히 영국 프리미어리그 등 축구 라커룸은 폐쇄적인 공간이다.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에이전트인 ‘FS코퍼레이션’ 이철호(33) 대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우 라커룸은커녕 훈련 장면도 공개하지 않는다”며 “미국 프로스포츠계와 달리 유럽과 일본의 축구는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라커룸 공개를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내 프로스포츠의 라커룸도 대부분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붙여 놓고 있다. 기자도 예외는 아니다. 한 스포츠기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라커룸에 들어가지 않는 게 선수들에 대한 예의”라고 말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