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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송영언/‘말로써 말 많은 청와대’

입력 | 2005-08-29 03:07:00


‘비서는 입이 없다’는 말이 있다. 공직사회와 민간기업의 비서 직군(職群)에 두루 해당되지만 대개는 대통령 참모들의 무거운 입을 강조할 때 쓰인다. 비서관의 부적절한 언행(言行)은 대통령의 잘못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래서 늘 말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출범 직전에도 이 말이 인용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내정자는 “요즘 일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제일 먼저 들은 말이 ‘비서는 입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서지 않고 묵묵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청와대의 분위기는 그런 다짐과는 딴판으로 ‘비서는 입이 많다’. 비서관들이 말의 경연(競演)을 하는 듯하다. 조기숙 홍보수석비서관은 한 방송에 출연해 “(노무현) 대통령은 21세기에 가 계시고, 국민은 아직도 독재시대의 문화에 빠져 있다”며 마치 대통령과 국민을 ‘우등’과 ‘열등’으로 나누는 듯한 극언(極言)을 했다.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라는 대통령의 심사(心思)를 헤아려 그런 식의 표현을 했는지 모르지만 ‘참여’정부 ‘홍보’수석의 발언치고는 상식 이하다.

김병준 정책실장은 “부동산 중(重)과세로 득(得) 보는 계층을 만들어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국민을 패싸움시킨다는 지적을 받았다. 윤태영 부속실장은 연정과 관련해 “(대통령은) 옳다면 주저 없이 간다”고 했다. 연정에 부정적인 다수의 국민은 옳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는 말인가. 비서관, 행정관 등이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언론과 야당에 험한 소리를 하는 것은 이미 청와대의 일상(日常)이 됐다.

청와대 내 비서관이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개혁의지를 국민에게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요즘 청와대에서 나오는 말들이 그런 차원을 한참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민생(民生) 현장과 괴리된 탁상공론, 해당 부처에서 하면 될 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 국민을 편 가르는 말, 특정인과 특정집단을 매도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역대 어느 청와대도 비서관들이 이처럼 많은 말을 쏟아낸 적이 없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노 대통령에 이어 참모들까지 너도나도 ‘말솜씨’를 자랑하니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다.

대통령 참모들이 말을 자주, 많이 하는 데는 그들의 과시욕(誇示慾)이 작용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이 힘있는 사람이며, 그래서 정보도 많이 갖고 있다는 점을 은근히 내세우고 싶을 것이다. 대통령을 향한 충성심의 확인 또는 아첨으로 들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말이 많으면, 그리고 설화(舌禍)가 쌓이면 결국 대통령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저런 사람이 대통령비서라니…’ 하는 반응은 바로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주말 취임한 이병완 비서실장은 처음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연정, 지역주의 청산 등 거창한 얘기를 많이 꺼냈다. 대통령 말씀의 복창(復唱)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청와대의 입을 줄이고 귀를 넓히는 것이다. 그래서 불필요한 말이 만들어내는 청와대발(發) 뉴스가 크게 줄어들었으면 한다. 임기의 반환점을 돌아선 대통령에게 말을 줄일 것을 요망하는 여론은 비서관들에게도 적용되는 주문이다. ‘말로써 말 많은 청와대’에 국민은 지쳤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