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간부로 일하다 얼마 전 퇴직한 김대원(가명·49·서울 강동구) 씨는 요즘 아침만 챙겨 먹은 뒤 무작정 집을 나서는 날이 많다. 집으로 찾아오는 아내 친구들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퇴직 후 한동안은 아내 친구들이 찾아와도 안방에서 책을 보거나 TV를 봤다. 그러나 어느 날 목이 말라 부엌에 잠깐 나갔다가 “제발 안방에서 나오지 말라니까”라며 언짢아하는 아내 얘기를 듣고 생활 패턴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동네를 걷거나 게임방에서 고스톱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점심 때 돌아오면 ‘전자레인지에 밥 있다’는 쪽지가 김 씨를 맞는다. 전자레인지에 밥과 국을 데우고 밑반찬을 꺼내 먹다가 문득 ‘따로 사시는 노모가 보면 얼마나 안쓰러워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 눈물이 핑 돈다.
현직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기러기아빠’ 생활을 하다 이혼한 친구의 고충을 듣는 것도 지겹지만, 겉보기에 멀쩡한 친구들도 “그동안 뭘 위해 뛰어 왔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한다. “내 자신의 건강이나 즐거움을 위해선 단 한 푼의 돈이나 1초의 시간도 쓴 적 없이 오로지 가족과 직장을 위해 살아 왔다고 자부했는데….”
우리 사회 중장년 남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경고성 지표들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 남성이 직장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극심함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일뿐만 아니라 가정생활, 친구 관계 등 삶의 전방위적 측면에서 스트레스와 소외감에 시달리는 남성이 급격히 늘고 있다.
남성을 위한 상담 기관인 ‘남성의 전화’는 올해 상반기(1∼6월)에만 1479명과 상담했다. 40, 50대가 대부분인 상담자들이 털어놓은 고민은 경제력 상실이나 부인의 외도에 따른 불화, 가정 내 소외감 등이 주를 이룬다.
문제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남성이 실직자 등 특별한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인제대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우종민(禹鍾敏) 교수는 “겉으론 문제가 없어 보이는 남성들 가운데도 고용 및 노후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가족 해체 현상 앞에서 ‘정신적 공황’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이 26일 발표한 ‘2004년 출생 사망 통계’에 따르면 50대 남성의 사망률은 여성에 비해 2.98배나 높다. 40대는 2.77배, 60대는 2.55배, 30대는 2.12배 높았다.
40대 남성 자살자는 2001년 1039명에서 2002년 1308명, 2003년 1681명으로 늘었다. 50대 남성 자살자도 2001년 842명에서 2003년 1241명으로 많아졌다.
남성의 전화 이옥이(李玉伊) 소장은 “가부장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남성들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닥쳐 온 변화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며 “물론 남녀 불평등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받는 불이익에 비해 남성들의 고통이 작을 수도 있겠지만 위기와 변화에 대한 적응 능력이 여성보다 훨씬 떨어져 고통이 배가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