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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동트기 전

입력 | 2005-08-30 03:00:00

그림 박순철


늙은 초나라 장수도 달리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곁에서 살펴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그래도 한동안은 망설이고 괴로워하는 체하다가 결연히 말했다.

“하는 수 없다. 성고로 돌아가자. 성안의 수레와 마소를 모두 모아들여 창고에 있는 곡식을 싣고 서문으로 빠져나가자!”

말은 그럴 듯했으나, 한번 그렇게 정해지자 오창을 지키던 초나라 군사들에게는 그때부터가 허겁지겁 쫓기는 도망길이 되고 말았다. 우선은 성안을 뛰어다니며 수레와 마소를 모은다고 모았으나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수레 서른 대에 마소 100마리를 넘지 못했다. 거기다가 성고로 따라가려는 백성들도 없어, 초군은 겨우 긁어모은 수레와 마소에 되는 대로 곡식을 나눠 싣고 급하게 오창 서문을 나섰다.

그때 한나라 진채에서는 진평이 가만히 한왕을 찾아보고 다시 독한 꾀를 냈다.

“우리 군사를 다치지 않고 성을 얻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 톨이라도 곡식이 성고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저들이 달아나기 시작하면 슬며시 한 갈래 군사를 보내, 사람은 놓아 보내되 곡식은 빼앗아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한왕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량이 한 말을 되뇌었다.

“초나라 군사들은 쫓기는 마음이라 많은 곡식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오. 우리가 오창을 차지함으로써 얻게 될 곡식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양이니 그냥 보내 주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저들이 곡식 수백 섬을 날라 가면 성고 성안 군민이 몇 달을 버틸 양식이 됩니다. 배불리 먹고 지키는 성을 빼앗자면 그만큼 우리 군사가 많이 상할 것이니 그 일은 또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래도 한왕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그리된다 해도 하는 수가 없소. 과인은 이미 성 안팎 10여 만의 군민(軍民)이 보고 듣는 앞에서 그리 약조하고 말았소. 제후나 왕은 거짓말로 속여도 되지만, 졸오(卒伍)에 든 병사나 힘없는 백성들을 속여서는 아니 되오.”

그러면서 끝내 진평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남의 군왕(君王)이 되어 쫓고 쫓기며 보낸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나름의 터득을 준 듯했다.

오창을 버리고 달아난 초나라 군사들의 뒷일은 장량이 제대로 맞춘 셈이 되었다. 초군이 성을 나설 때만 해도 서른 대 수레에 곡식을 가득 싣고도 남은 마소마다 곡식 바리를 얹어 수백 섬이 넘었다. 하지만 일없이 성문을 빠져 나오자, 정말로 성 밖이 조용하고 아무도 길을 막지 않는 게 오히려 쓸데없는 걱정에 빠져들게 했다. 아무도 뒤쫓지 않는데도 공연히 겁먹어 허둥대며 한시라도 빨리 오창에서 멀어지려 했다.

마음이 그렇게 급해지니 무겁고 부피 큰 곡식을 옮기는 일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먼저 걸음 느린 소가 끄는 수레가 버려지고, 다시 말이 끄는 수레 위의 곡식도 빨리 달릴 수 있게 덜어졌다. 거기다가 나중에는 곡식 바리 실은 마소까지 놓아두고 달아나 실제 성고 성안에 들어간 곡식은 100섬이 넘지 못했다.

한왕은 그날 해질 무렵에야 장졸들을 이끌고 텅 빈 오창 성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에 가득한 곡식을 풀어 군민을 배불리 먹이고, 오랜만에 잔치를 열어 장수들을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