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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대한민국/21세기 新고전 50권]레 미제라블

입력 | 2005-08-31 03:06:00


‘세상에 이와 같은 일이 끊이지 않는 한 나의 소설은 영원히 읽힐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서론이다. 오래도록 영 잊혀지지가 않는다. 서론 다음에 짤막한 서시(序詩)가 실려 있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싸우는 것이다. 다음의 문제는 무엇이냐. 이기는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는 무엇이냐. 죽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찍혀 있는 레미제라블의 이미지는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장발장 이야기.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지고 텔레비전에서 수도 없이 방영된 일이라서 전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유명한 소설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내내 일본말로 학교생활을 하다가 6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당시 내 숙부님 방에는 꽤 많은 책이 있었는데 모두가 일본책이었다. 우선 소설책부터 빼들었는데 첫 번째 잡힌 책이 레미제라블이었다.

나한테는 실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 수십 권이 될 만큼 장문의 소설이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겨울방학에 대충 한 번 읽었다. 일본어 실력이 모자라 첫해에는 스토리 중심으로 읽었고 다음 해에는 조금 구체적으로 읽었고 세 번째, 즉 3학년 때는 글자 한 자 건너뛰지 않고 그야말로 완독을 했다.

몇 해 전 뉴욕에 들렀을 때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감상했는데 저건 누구이고 지금은 무슨 장면이고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불편 없이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지금 일흔을 넘겼고 레미제라블을 접한 지 60년이 되었지만 빅토르 위고의 정신은 나의 가슴 밑바닥에서 지금도 끊이지 않는 물결이 되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정의 평화를 위한 인간정신의 영원한 기념비…. 레미제라블은 그렇게 기념비적으로 흔들림 없이 내 마음속에 지금도 큰 기둥으로 서 있다. 듣건대 그 소설 속에는 프랑스말 사전이라 할 만큼 온갖 단어가 다 들어 있다 한다. 속어와 사투리에서 고급 언어에 이르기까지 죄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상이라는 말이 있다. 언어가 다듬어져야 우리들 삶이 다듬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뒤로 수많은 명작소설들을 읽었다. 그리하여 문학은 내게 아주 친근한 반려자가 되었다. 내가 그림의 길에 들어서고 훗날 금동미륵반가상과 석굴암 불상을 만나게 되었다. 서양의 그리스도 정신을 레미제라블에서 배우고 동양의 불교정신을 한국 불교미술에서 배운 결과가 된 것이었다.

한 권의 소설, 한 점의 조각 작품이 한 인간의 삶을 운명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그렇게 살아온 나로서는 인생은 짧되 예술은 길다는 격언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술과 종교는 서로 많이 닮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그 안에는 궁극의 가치, 세상의 평화, 그런 끝날 수 없는 영원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을 나는 의심 없이 믿는 것이다. 나쁜 사람, 착한 사람, 전쟁과 기아, 사랑과 연민, 잔혹함과 비정함 등이 있는 한, 세상에서 이와 같은 부조리한 일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장발장은 죽지 않고 레미제라블은 영원토록 읽힐 것이다.

최종태 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