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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홍찬식]私교육 부채질하는 평준화 집착

입력 | 2005-09-02 03:10:00


올봄 한국의 고1 학생들이 내신등급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을 때 프랑스에서도 고등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우연하게도 두 시위 모두 새 대학입시제도 도입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고교생 시위의 발단은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같은 바칼로레아 개혁안이었다. 바칼로레아의 시험과목 12개 가운데 6개를 폐지하고 고교 내신 점수로 대체하겠다는 게 프랑스 당국의 계획이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내신의 합리성,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학생 수가 많은 고교에 다니느냐, 적은 고교에 다니느냐에 따라 불리한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기회의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시위에 참여한 고교생이 16만 명으로 늘어나자 프랑스 교육부가 서둘러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는 평등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고교는 물론이고 대학까지 평준화 체제를 택하고 있다. 국내에서 교육개혁을 논의할 때 프랑스가 모범 사례로 등장한다. 현 정권 들어 교육평등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프랑스 교육이 더 빈번하게 거론되고 있다.

한국에서 내신 반영 문제는 프랑스보다 훨씬 뜨거운 이슈다. 고1 학생들의 시위는 2008년 시행될 내신 위주의 입시에서 비롯됐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불을 붙인 서울대의 ‘본고사형 논술’ 논쟁도 그 연장선에 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이번에 대입 논술시험의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것은 내신 입시를 더 공고히 하겠다는 뜻이다.

같은 평준화 체제에서 ‘불합리한 내신’이라는 공통의 문제에 맞닥뜨린 한국과 프랑스의 대응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기회의 평등 문제까지 들고 나온 프랑스 고교생의 주장은 논리 정연하며 자못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이에 비해 한국의 교육당국이 내세우는 논리는 옹색하고 허점투성이다.

내신 반영에서 우리 교육 당국은 전국 각 학교의 학력 수준이 동일하다는 허구의 논리를 고집하고 있다. 좋은 고교, 나쁜 고교가 분명해 이 때문에 부동산 값 파동이 일어나는 나라에서 어떻게 학력 수준이 같다고 우기는가.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언급하는 ‘교육 기회의 평등’에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주어져야 할 기회의 균등이 제외되어 있다.

교육 당국은 “평준화 체제에서 학교 서열화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국민의 평등의식 정서를 자극하는 그럴듯한 말이다. 프랑스는 어떨까. 프랑스 교육부의 홈페이지에는 프랑스 내 1400개 고교에 대한 평가표가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다. 바칼로레아 합격률, 그해 졸업생의 바칼로레아 평균성적이 학교별로 실려 있는 것이다. 전국의 고교를 서열화해 놓은 것과 다름없다.

한국의 교육부 캐비닛에는 이런 자료가 일급비밀로 취급되고 있다. 자료 공개 자체가 평준화에 역행하는 것으로 금기시된다. 프랑스 국민의 평등의식이 우리보다 못해서 학교 서열화를 수용하고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존재하는 현실의 반영이 교육을 위해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 사례를 들이대면서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고 전체적인 것을 외면해선 안 된다.

평준화 유지를 위해 교육의 본질을 평준화보다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어낸 것은 본말(本末)의 전도다. 이를 알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동안 교육은 더 꼬여만 가고 있다. 교육부가 ‘논술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자 대학들이 심층면접을 확대할 움직임을 보이고 심층면접 과외가 늘어난다고 한다. 사교육을 줄이려고 만든 새 입시제도가 내신, 수능시험, 논술에 이어 심층면접까지 사교육 수요를 계속 확대하고 있는 현실이 어이없다. 평준화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