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나는 왜 꼭 친할머니냐.”
강모(42·서울 양천구 신정동) 씨는 최근 어머니 생신 모임에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다섯 살 난 막내아들에게 강 씨의 어머니가 “엄마 아빠 다음에 누가 제일 좋아?”라고 물었다. 아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서슴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작은이모랑 쏘나타 삼촌(쏘나타를 몰고 다니는 막내외삼촌)”이라고 대답했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는 이어 “음… 그리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라고 덧붙였다. 첫 번째로 꼽힌 줄 알고 흐뭇해하던 어머니는 처음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외가 쪽을 뜻한다는 걸 알아채고 안색이 변했다. 사실 아이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를 부를 땐 꼭 ‘친’자를 붙이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렀다. 평소엔 그냥 귀엽다는 듯 듣고 넘기던 부모님이지만 이번엔 몹시 불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이들이 외갓집 식구들과 훨씬 친한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강 씨는 착잡했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는 육아를 장모에게 의탁해 왔다. 그래서 집도 처가(목동) 근처로 옮겼다. 경기 구리시에 있는 본가 방문은 두서너 달에 한 번씩인 ‘특별 행사’가 됐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이모들을 엄마만큼 편하게 따르고 이종사촌과도 친형제처럼 논다. 하지만 고모 쪽은 왠지 서먹해한다. 막내는 때론 고모란 호칭도 잊어먹곤 한다.
“애들이 외갓집 식구들을 더 좋아하고 따르는 게 섭섭하진 않아요. 하지만 ‘빼앗긴 아들’ 취급하며 섭섭해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착잡합니다. 더 자주 찾아뵙고 싶지만 집사람도 일에 치여서….”
사실 강 씨 가족처럼 본가보다는 처가 쪽으로 추(錘)가 기우는 것은 요즘 드문 사례가 아니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면서 육아 부담을 친정 부모가 지는 ‘외가 위탁형 육아’가 늘어나 자연스럽게 처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
지난해 여성부가 양가 부모가 생존한 1755명의 기혼 남녀에게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부모 세대 중 어느 쪽에서 도움을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아내의 부모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대답이 18.1%로 남편 쪽(11.1%)보다 높게 나타났다. ‘어려울 때 정서적 지원을 주는 부모가 누구냐’는 질문에서도 남편의 부모(3.7%)보다 아내의 부모(12.1%)가 훨씬 높게 나타났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본가 쪽으로 기울었던 ‘봉건적인 시댁 중심 문화’가 위축되면서 균형을 잡아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상당수 여성은 상존하는 부계 중심의 전통에 묻혀 허리가 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 추세에 대한 가치 판단과는 별개로 과도기를 살고 있는 중년 남자들로선 전통과 현대 사이에 낀 새우처럼 난감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한모(43·경기 성남시) 씨는 명절만 다가오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 신혼 초부터 ‘시댁에 가는 일이 큰 스트레스’라며 입이 붓곤 하던 아내가 요즘도 명절이면 일찌감치 아침 차례만 끝나면 자신과 아이들의 손을 잡아끌고 나오려 하기 때문. 명절 전날의 차례 준비를 포함해 연휴의 반을 본가에서 보냈으니 나머지 반을 처가에서 보내는 게 형평에 맞는 일 같기는 하지만, “지금 가려고? 그래, 처갓집에도 잘해야지”라며 등을 두드려 주는 아버지의 눈에 담긴 섭섭함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혼잣말처럼 “못난 놈이…”라며 못마땅해한다.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 자기 나이 때, 병드신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던 기억을 하면 자괴감과 죄책감이 가슴을 후려친다.
“예전에 시댁이란 여성에게 ‘면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겨졌습니다. 오죽하면 ‘죽더라도 시댁 귀신이 돼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여성은 ‘아이들이 내 편’이라는 자신감에 덧붙여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까지 갖추게 됐습니다.” 남성의 전화 이옥이(李玉伊) 소장의 설명이다.
양측 부모에 대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동등한 배려를 해야 한다는 아내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지만, 아들 가진 노부모의 마음은 또 다르다. 그 사이에서 남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곤 한다는 설명이다.
최근 형님상을 당한 성모(46) 씨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한창 나이의 형을 잃은 슬픔을 채 수습하기도 전인데 형수가 ‘우리 집에는 이제 남자도 없으니 아버님 제사는 삼촌네가 모시라’고 통고한 것. 그러자 성 씨의 아내는 “제사를 집을 옮겨 가며 모시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일축했다. 장모도 “무슨 소리냐. 죽었어도 장남집이지”라며 아내의 역성을 들고 나섰다.
성 씨는 “이제 곧 아버지 제사가 돌아오는데, 안 그래도 형님 일 때문에 몸져누우신 어머니께는 말씀도 못 드렸다”며 난감해했다.
이의수(李義壽) 남성사회문화연구소장은 “독립된 가정을 이룰 때부터 양가 부모와의 관계, 재정 지원 등에서 일정한 원칙을 세우고 그 범위 내에서 양가 부모를 배려하도록 약속해 두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특히 아내들이 친정 부모들과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반면 남편들은 아내는 물론 자기 부모와도 일상적인 만남과 대화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며 “본가든 처가든 원활한 의사소통과 일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대부분의 갈등을 미리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조언했다.
벼랑 같은 일터에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안절부절못하고, 가정에선 외딴섬처럼 고립돼 버린 이 시대의 중년 남자들. 그들은 일, 가정, 효도, 친구관계 등 어느 것 하나 떳떳이 내세울 게 없다는 패배감 속에 지쳐 가고 있다.
그 원인이 가혹한 경쟁 때문이든, 그 자신도 물들어 있는 가부장적 문화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이든, 경륜과 관록으로 사회와 가족을 이끌어 가는 그런 안정감 있고 자신감 넘치는 중년 남자의 모습은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는 게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