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민은 이제 길에서 불량배를 만나도 한칼에 벨 것처럼 단단해 보인다.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늘 다른 역할을 맡았고 그때그때 충실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이종승 기자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했다. 백의종군(白衣從軍)하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李舜臣). 1597년 9월 12척의 배로 왜선 300여 척에 맞서야 하는 명량대첩에 임하며 그는 죽을 각오로 살고자 결심했다.
지난해 4월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탤런트 김명민(金明民·33)의 마음도 그랬다. 2년 넘게 공들였던 영화 두 편이 촬영 90%를 넘기고 ‘엎어졌다’. 3개월여간 출연한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는 호평을 받았지만 자신이 맡은 인물은 너무 작아 보였다. 연기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기 위해 집도 팔고 차도 팔았다. 그때 제작팀에서 연락이 왔다.
“제장(諸將) 중 하나를 맡기려나 보다 했죠. 이순신 장군 역이라는 말을 듣고는 ‘도대체 저의 무엇을 보신 겁니까?’라고 반문했을 정도였어요.”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고 생각했다. ‘불멸의 이순신’은 그렇게 시작됐다. 2004년 4월 16일 첫 회 시청률 16.5%. 그러나 2005년 8월 28일 마지막 회 시청률은 31.0%(AGB닐슨미디어리서치)였다.
○ 육체의 고통보다 더했던 이순신과의 불화
“보통 사람이었어요. 울고 웃고 화내고 안타까워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삭이고 오로지 적을 이기는 것만을 생각한 사람. 대본을 보면서 수도 없이 ‘나라면 원통해서 가슴을 쳤을 텐데…’라고 생각했어요.”
연기자 김명민을 무엇보다 괴롭혔던 것은 ‘캐릭터와의 불화’였다. 겨울에는 손발이 얼어붙는 바닷바람을 견뎌야 했고, 여름에는 20kg짜리 갑옷을 입고 불볕더위 속에서 버텨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육체의 고통을 웃돌았다.
드라마에서 이순신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압송되면서 “그대들이 먼저 마음을 열고 통제사 원균에게 조선에 대한 충심을 보이라”고 한다. 사도첨사 황세득(黃世得) 장군을 잃고 슬픔에 잠긴 부하들에게 “전장에서 죽음이란 등짐같이 짊어지고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대사를 연습하며 김명민은 “눈물 콧물 다 흘렸다”고 했다. “이런 지경에 처했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사람이 아니다 싶었어요.”
무조건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반복해서 대사하고 움직이다 보니 어느 순간 알 것 같았다. “수군(水軍) 폐지론이 나왔을 때 이순신이 칼 차고 갑옷 입은 채로 부하들을 이끌고 선조를 만나러 가는 것으로 설정됐어요. 지금껏 연기한 이순신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어요. 원칙을 투철하게 따지는 사람이 칼을 차고 임금을 만나다니요. 제작진을 설득해서 결국 갑옷을 벗고 칼도 차지 않고 들어갔지요.”
○ 삶의 벼랑 끝에서 만난 이순신
마지막 회 노량해전을 찍으며 수없이 NG를 냈다. “그때는 정말 이순신이 아니라 김명민이 되더라고요.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살다 가다니,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서요.”
김명민에게도 돈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던 때가 있었다. 2000년 드라마 ‘뜨거운 것이 좋아’로 얼굴을 알리고 “이제 시작”이라며 흥분했다. 2001년 영화 ‘소름’으로 주목받고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자꾸만 가라앉았다. 유치원 학예회 때 정전이 된 것도 모르고 춤을 춰 “천생 무대 체질”이라고 박수 받은 뒤 다른 길은 생각도 하지 않고 달려왔는데, ‘연기를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하는 날이 왔다. 그때 이순신을 만났다.
캐스팅 결정 뒤 이순신 장군으로는 이미지가 약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왔던 것을 돌아보며 김명민은 “드라마 끝나고 다행히 그런 얘기는 없네요”라며 여유롭게 웃었다.
“이순신으로 살며 ‘굳은 소신으로 간절히 소망한다면, 죽고자 하는 각오로 맞선다면, 고난은 기적으로 바뀐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겪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순신의 삶이 지침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김명민은
△1972년 서울생
△1996년 서울예대 연극과 졸업
△1996년 SBS 공채 탤런트 6기로 데뷔
△TV드라마 ‘뜨거운 것이 좋아’(MBC·2000)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KBS·2001) ‘아버지와 아들’(SBS·2001)
‘꽃보다 아름다워’(KBS·2004) 등 출연
△영화 ‘소름’(2001) ‘거울 속으로’(2003) 출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KBS·2004년 4월∼2005년
8월)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