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제왕(齊王) 전광이 한나라와 손잡게 된 일을 스스로 다행히 여기면서 연일 잔치를 벌여 역이기와 술을 즐기고 있는 사이에 다시 며칠이 지나갔다. 그렇게 되니 역이기가 한단을 떠난 지 보름이 훌쩍 넘었다.
장이의 도움을 받아 한단에서 군사를 기르고 있던 한신은 역이기가 떠나고 보름이 넘어도 아무런 전갈이 없자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먼저 조참과 관영을 불러 속을 떠보았다.
“제나라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고 속임수가 많은 데다 남의 밑에 들기를 싫어하오. 시황제가 육국(六國)을 아우를 때도 제나라가 가장 늦게 진나라 밑에 들었고, 작년에는 항왕의 불같은 10만 대군도 끝내 막아냈소. 역((력,역)) 선생이 아무리 변설이 뛰어나다 해도 싸움 한번 없이 우리 한나라에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런데 역 선생이 떠난 지 보름이 되어도 제나라에 풀어둔 간세(奸細)들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아무래도 일이 글러버린 것 같소. 이제 우리는 어찌하면 좋겠소?”
조참과 관영 또한 장수로서 오래 싸움터를 누빈 사람들이라, 유세(遊說)니 화평이니 항복이니 하는 것을 별로 믿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신의 말을 받았다.
“역 선생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면 우리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치(臨淄)로 밀고 들어가기 좋은 곳으로 군사를 옮겨 두었다가 역 선생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요.”
그 말에 한신이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말했다.
“우리가 먼저 군사를 움직이는 게 대왕의 엄명을 어기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 없구려. 마침 새로 얻은 군사의 조련도 대강 끝났으니, 일이 터지면 대처하기 좋은 곳으로 옮겨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소.”
그때 한신의 책사(策士)로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광무군 이좌거(李左車)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듣기로 역 선생께서는 한단 남쪽에서 하수(河水)를 건너셨다 했으니 아마도 동아(東阿)와 역성(歷城)을 거쳐 임치로 갔을 것입니다. 임치에서 일이 잘못되었다면, 역 선생께서 동아와 역성을 지나신 것이 수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한 격이 됩니다. 우리는 멀리 북쪽으로 올라가 평원(平原) 맞은편 나루에서 하수를 건너면 어떻겠습니까? 거기서 제나라로 들어가면 곧장 임치로 치고들 수 있습니다.”
한신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다음 날로 군사를 일으켜 하수를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서둘러 부풀린 군사에다 조참과 관영의 군사를 좌우 날개로 삼은 3만 군사였다.
한신의 군사는 밤낮없이 내달아 한단을 떠난 지 사흘 만에 평원성 맞은편 하수 나루에 이르렀다. 거기서 하루를 쉬며 한 번 더 사람을 풀어 임치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그날 날이 저물기도 전에 하수를 건너갔던 사람들이 잇따라 돌아와 알렸다.
“제왕이 우리 대왕께 항복하였습니다. 벌써 열흘 전에 제나라 사신이 그 같은 제왕의 뜻을 전하기 위해 오창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제왕은 70여 개의 성을 한나라에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합니다. 역이기 선생은 수레 위에 앉아서 세치 혀로 제나라를 평정한 셈입니다.”
글 이문열